바야흐로 양극화가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경제성장율보다 자본의 수익률이 더 크기 때문에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라 주장하는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를 시대의 경제학자로 호출하는 것은 그의 진단 및 처방이 우리 시대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문제를 화두로 제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불평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최근 헤더 프링글(Heather Pringle)이 사이언스에 게재한 “1%의 고대적 뿌리들”이라는 논문은 인류의 불평등의 기원이 농경사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주는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보여준다. 고대 사회에도 불평등은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지난 호에서 다루었던 <염철론>을 보면, 동서양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열렸던 시기인 한 나라 초기에도 이미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양극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공자를 추종하는 유학자도, 관자를 추종하는 황로학적 법가주의자도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였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모두 국가주의적 해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이었고, 그래서 같이 논쟁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주의적 해법은, 국가가 부패하지 않고 올곧게 그 방책들을 운영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지만, 국가가 부패한다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역사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 못지않게 국가의 부패가 큰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국가는 인민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양한 방책들을 만들지만, 기실 그 방책들은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는 특권층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the haves and the have nots)간의 불평등이 지배자와 피지배자(the ruler and the ruled)간의 불평등으로 바뀐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을 동시에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불평등과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불평등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찌 보면 지난 2000여년의 중국의 역사는 이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중국에서 제안된 해법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아나키스트적인 해법으로, 노자의 ‘무위와 무욕의 이상사회’인 소국과민(小國寡民)론이다.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이야기해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작은 국가를 만들고, 그 속에 ‘무위와 무욕의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것인데, 사회적 분업의 고도화로 상징되는 높은 수준의 문명을 거부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불평등을 보편적 나눔의 체계로 해결하려는 것으로, 중국적 대승불교가 그것이다. 중화문명권이 불교문화권으로 재편되었던 것은 중국적 대승불교의 해법이 한동안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셋째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의 불평등을 국가주의적 방법으로 해결하되,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불평등을 막기 위해 공의(公議)에 의한 민본주의적 통제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명말청초의 대학자 황종희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 그 예이다. 황종희는 이 책 때문에 후대 사람들에게 중국의 루소로 불렸는데, 그럴만한 책이었는지는 다음에 고찰할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고찰할 것은 중국적 대승불교가 제시한 보편적 나눔의 체계이다.
대승불교와 보살(菩薩)의 도(道)
이제 불교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인데, 다소 전문적이어서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공짜 점심은 없다. 낯선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내가 필요하다.
불교는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로 인도에서 출현하였다. 불교가 개인적 해탈의 종교에 머물렀다면, 동아시아의 문명의 기축을 바꾸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불교가 모든 중생의 구제를 지향하는 대승불교가 됨으로써, 불교는 인도의 울타리를 넘는 보편종교가 되었으며, 중화문명권을 불교문화권으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추구하는 보살(菩薩)의 도(道)라 할 수 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위로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깨달음(菩提)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인데,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대구를 이루는 문형이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깨달음은 자신 속에 내재하는 불심(佛心)을 키워 번뇌를 초극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화중생이 상구보리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법원주림>의 ‘육도편’을 보자.
“자비로운 마음이 있는 이는 남을 위하여 열반조차도 오히려 버리거늘 하물며 몸과 마음과 재물을 버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재물을 버리는 이는 몸을 버리는 것보다는 못하고 몸을 버리는 것은 열반을 버리는 것보다도 못하다. 열반조차도 오히려 버리거늘 어찌 버리지 못할 것이 있겠느냐. 자비로운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고 자유자재할 자비를 얻어서 구제를 짓는 것은 큰 보살의 보시라 도무지 어려울 것이 없다.”
자비심으로 자신의 열반조차 버리는 것, 어쩌면 이 경지는 열반을 추구하는 경지보다 더 높은 깨달음의 경지일지 모른다.
<법원주림(法苑珠林)>이란 어떤 책인가?
대승불교는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재가자(在家者)의 수행도 높게 평가한다. 그렇지만 현세(現世)를 이상사회로 만드는 것이 불교의 목표는 아니어서, 불교는 이상적인 현세상(現世像)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각 지역에는 그 지역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도리의 체계가 있다. 인도에는 인도인들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하는 질서가 있으며, 중국에는 중국인들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하는 질서가 있으며, 한국에는 한국인들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하는 질서가 있다.
대승불교는 자신이 고집할 이상적인 인간의 도리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각 지역의 사람들이 이상적인 인간의 도리라 생각하는 것을 수용하는데 별 저항감을 느끼지도 않고, 또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초극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높은 비중을 두지도 않는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을 설명하면 족한 것이다. 한국의 절에는 삼신당이 있고, 일본의 절에는 신사가 있다. 불교는 샤머니즘적 믿음 즉 토속적인 정령이나 귀신에 대한 믿음마저도 배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지역에 있는 샤머니즘적 정서마저도 수용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을 설명하면, 그 지역의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에 대해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지 않고 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다.
<법원주림>은 당 나라 고종 때 승려 도세(道世)가 편찬한 불교 백과사전인데, 고려대장경 속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당 나라 시대에 승려들이 불법을 설교할 때, 중국인들이 인간의 도리라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그것을 이용하여 불법을 설교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법원주림>의 ‘육도편’을 보자.
“재가자(在家者)가 만일 세속의 정(情)을 버리고 고상한 뜻을 흠모하면서 오로지 삼보(寶)를 숭상하고 사덕(德)을 닦아 지니며, 효(孝)·제(悌)와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정(貞)·화(和)·애(愛)·경(敬)을 봉행하되 이 행을 능히 행하면 도리어 내교와 같거니와 만일 이 뜻에 어긋나면 도로 외도(外道)와 같아진다.
세속에 있는 사람도 내교를 따르면서 진리를 깨치고 마음이 항상 도(道)에 일치하여 점차로 수승한 길로 나아가면 보리에 이르게 된다.”
효(孝)·제(悌)와 인(仁)·의(義)·예(禮)·지(智)는 바로 공자가 인간이 추구하여야 할 가치로 들었던 것들이다. <법원주림>은 이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서경(書經)>의 구절을 인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경>의 구절들이 불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바로 이 때문에, 안팎의 가르침(內外之敎)이 그 근본은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잘 지켜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이에 머무르지 않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불·법·승을 의미하는 삼보(三寶)를 숭상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중국적 대승불교란 유교적인 인간적 도리의 체계 위에 구축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추구하는 보살의 도라 할 수 있다.
중국적 대승불교가 유교적인 인간적 도리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적 대승불교의 전파과정은 그 속에 깃든 유교적 가치체계의 전파과정이기도 하였다. 주자학의 나라인 조선왕조가 중국적 대승불교를 수용한 고려로부터 태동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보편적 나눔으로서의 보시(布施)
보살이 하화중생하는 방법은 자신이 깨달은 불법을 재가자(在家者)에게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법시(法施)라 하였다. 반면 재가자는 보살이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재물을 공양하는데, 이를 재시(財施)라 하였다. 보시(布施)란 원래는 보살과 재가자가 서로 법시와 재시를 교환하는 상호 시혜적 교환의 체계를 의미하였다. 탁발승이 집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면, 그 집의 아낙이 나와 시주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후 재시(財施)는 재가자가 보살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재물을 나누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법원주림>의 ‘육도편’을 다시 보자.
우바새계경에서 말씀하셨다. “만일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 배의 과보를 얻고, 계율을 깨드린 이에게 보시하면 천 배의 과보를 얻으며, 계율을 지닌 이에게 보시하면 십만 배의 과보를 얻고, 외도(外道)가 욕심을 여읜 사람에게 보시하면 백만 배의 과보를 얻으며, 도를 향하여 수행하는 이에게 보시하면 천억 배의 과보를 얻고, 수다원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얻으며, 사다함을 수행하는 이에게 보시해도 한량없는 과보를 얻고, 내지 부처님께 보시하여도 한량없는 과보를 얻느니라.”
보시는 부처님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을 깨뜨린 사람뿐만 아니라 축생에게도 하는 것이며, 축생에게 할 때에도 주는 것의 백 배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물론 우바새계경에서는 부처님께 보시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받기 때문에, 축생에게 주어 받는 과보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축생에게 주는 것도 가치 있는 일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보시할 때에는 한량없는 과보를 얻지만, 축생에게 보시할 때는 백 배의 과보를 얻는다면,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에게만 보시하고 축생에게는 보시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대상에 대해 적절하게 보시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각 대상별로 행하는 보시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고 표현하면 될 것이지만, 아직 한계효용의 개념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뜻을 구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겨두고 있다.
“만일 평등에 의거하여 보시를 행한 사람이면 자비와 공경을 물을 것이 없다.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얻는 복이 크고 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르기를 ‘나누어서 두 몫으로 만들어 한 몫은 저 난승(難勝) 부처님께 보시하고 한 몫은 성안의 최하의 걸인에게 주면 그 복전은 둘이 없고 똑같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에게 보시할 몫과 걸인에게 보시할 몫을 반반으로 하면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평등에서 찾은 것이 돋보인다. 불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불심을 가지고 있어서, 모두가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모두가 부처라는 평등주의적 관념이 보시에도 구현되었다고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
뿐만 아니라, 보시는 가진 자만이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보시할 수 있고, 보시할 것이 있다는 점에서, 보시의 보편적 나눔으로서의 성격은 강화되는데, <법원주림>의 ‘육도편’을 다시 보자.
우바새계경에서 부처임은 말씀하셨다.“만일 사람이 재물이 있으면서 구걸하는 이를 보고서도 ‘없다’고 하거나 ‘바쁘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생에 빈궁하고 박덕하리라는 것을 이미 말한 줄을 알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을 방일(放逸)한 이라 한다. 스스로가 ‘재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온갖 물이나 풀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기 때문이다. 비록 국왕일지라도 반드시 보시한다고는 하지 못하며 비록 가난할지라도 보시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 역시 식사의 몫이 있고, 먹은 뒤에 그릇을 씻고 버릴 찌꺼기일지라도 먹을 만한 것을 보시하면 역시 복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보편적 나눔의 세계가 잘 전개된다면, 부익부 빈익빈이 야기하는 양극화 문제는 상당히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당시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들불처럼 퍼져 나갔던 것은 양극화에 대한 해법을 요구하였던 당대의 요청에 대승불교가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시는 ‘중국형 오블리스 노블리제 + 무조건적 기부 + 환난상휼’의 문화였다.
보편적 나눔은 시장경제체제와 양립가능한가?
보편적 나눔은 시장경제체제를 부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보편적 나눔은 시장경제가 야기할 수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체계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경제체제 그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으며, 그에 대해 어떤 규제를 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방임의 사상과 양립가능하다. 오히려 불법적으로 얻은 재물은 보시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시장경제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소유권과 보편적 신뢰의 체계를 강화시켜 준다. <법원주림>의 ‘육도편’을 다시 보자.
"대보적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보시하지 않아야 할 것에 다시 5종의 일이 있다. 1은 도리가 아니게 구한 재물이면 남에게 보시하지 말 것이니, 그 재물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2는 술과 독약은 남에게 보시하지 말 것이니, 중생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다. 3은 짐승을 잡는 그물은 남에게 보시하지 말 것이니, 중생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4는 칼과 몽둥이와 화살은 남에게 보시하지 말 것이니, 중생을 해치기 때문이다. 5는 음악과 여색(女色)은 남에게 보시하지 말 것이니, 청정한 마음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도리가 아니게 구한 재물은 보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무엇이 도리가 아니게 구한 재물인가? 다양한 것이 예시되어 있는데, 강제로 빼앗은 것, 도둑질한 것, 관리들이 강탈한 것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보편적 나눔의 체계로 시장경제체제의 폐해를 넘어설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들이 모두 보편적 나눔의 체계에 동참할 충분한 유인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해탈에 의해 벗어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반복적 게임의 세계에서 살고, 이 게임의 룰은 인과응보이다. 인과응보라는 게임의 룰이 잘 설정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이 게임의 룰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믿는다면, 보편적 나눔의 체계는 잘 작동하게 될 것이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