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7년여 전, 서울 모 대학에서 100여명이 넘는 대학 4학년 학생들과 ‘고령사회구조의 변화’라는 과목의 노년기 빈곤에 관해 수업을 하던 중, 필자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본인이 현재 빈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는가?” 몇몇 장난처럼 웃으며 손을 올렸다 내리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끝까지 자신을 빈곤하다고 손을 들었던 학생은 없었다.
“그렇다면..미래에, 본인이 노인이 되었을 때 빈곤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해 학생들은 아까의 장난스러웠던 표정대신 신중하게 생각하더니 주위를 살피다 한 명, 두 명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정확하진 않아도 지금 기억으로는 절반 정도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던 것 같다. 질문을 해 놓고도 손을 든 학생이 생각보다 많아 꽤나 놀란 기억이 있다.
“우리의 노년기가 빈곤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학생들과, 그렇지 않을거라 생각한 학생들.. 한번 이야길 해보자. 무엇이 우리의 노년기에 대해 다른 가능성들을 예측하게 했는지.”
무엇이 이 청년들의 노년에 대한 기대를 갈라놓았는지 알고 싶었다.
시골출생으로 고등학생 때 서울로 유학을 와, 온갖 아르바이트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학습학원 한번 다녀본 경험 없이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과 더불어 생계를 위해 도매의류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며 어느새 서른 살, 늦깍이 졸업을 앞둔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매 수업마다 정확하게 10분씩 늦는 그 학생의 지각 사유가 밤을 꼴딱 새어 옷을 팔고 장사를 마무리한 후, 수업시간에 맞춰 달려오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이 학생에게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그의 이야기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잘 살거나 빈곤하게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가난한 노인들이 모두 젊어서 게을렀거나 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이 노년기에 빈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할만한 어떠한 정보나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정보나 기회에 접근하고 활용하는 계층은 사회에 구별된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도 저도 제가 빨리 그 기회를 갖기 위해 서울로 와서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걸 기대했지만 지금 저는 밤새고 일을 해도 여전히 등록금과 용돈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지리란 기대가 있지만, 그래도 노년기를 생각하면 그다지 제가 기대하는 만큼 잘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빈곤이라는 말 대신 가난이라는 용어가 더 친숙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가 관여하기 이전의 빈곤은 ‘가난함’, ‘살아갈 소득이 부족하거나 없음’과 같은 개인이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나가기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통칭하는 용어였고, 일제치하,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과정 등 너무나 길고도 익숙했던 가난의 터널로부터 반드시 탈출해야 할 국가의 과업이었으며, 더 절박하게는 절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선 안되는, 이 나라 어버지들과 어머니들의 고통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절박한 희생과 노력으로 국가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갔고, 이러한 성장 뒤에 당연한 부작용처럼 부풀어 오른 가난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의 성장에 희생했던 ‘그들’이었고, 이들의 가난은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부족함’의 문제를 넘어 국가가 관여해야할 사회경제의 구조적인 ‘결여’의 문제, 즉 ‘빈곤’으로 명명되었다. 어쩌면 빈곤이라는 개념 안에는 빈곤으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기회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간에 불평등한 속성이 깊이 내재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빈곤은 절대적이던, 상대적이던 ‘불충족’의 문제
그렇다면 빈곤이란 무엇인가? 경제학자인 Hagenaars and de Vos(1988)는 빈곤의 속성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생활수준의 절대적 최소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보다 필요를 충족한 자원을 덜 가진 것, 안녕의 상태를 충족할 그 무엇을 충분히 갖지 못한 것과 같이 빈곤의 형태가 절대적이던, 상대적이던 간에 ‘불충족’의 문제로 제시했다. 반면, 빈곤을 다차원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던 Vranken(2002)은 빈곤을 복합적인 사회적 배제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제가 빈곤층으로 하여금 비빈곤층 구성원들의 생활습관, 문화 등 다양한 영역들과 구분되게 할 뿐 아니라 빈곤층 스스로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거나 대처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하였다.
여기서 필자가 집중하는 것은 ‘불충족’으로 속성화된 빈곤과 ‘복합적인 사회적 배제’로 현상화되는 불평등의 기형적인 관계이다, 왜냐하면 빈곤이 단순히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사회적으로 보호해야할 계층을 가름하는데 사용되는 수동적인 지표가 아니라 이 현상에 기생충처럼 동반하여 역동하는 불평등과의 상호작용 맥락을 짚어보는 것이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재해석하고 앞으로 대처해야할 빈곤을 직면할 수 있는 의미있는 지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빈곤을 우리 일반적인 사회구성원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불충족’의 현상으로 정의하고 필자의 그 동안 현장연구 경험을 토대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솔직히 빈곤이라는 주제와는 거리가 먼, 주로 자살시도자와 유가족들을 만나 질적 종단연구를 하는 필자에게 빈곤은 이론적으로 명확히 구체화하고 정립된 개념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서 자살이라는 매우 극단적인 결단을 초래하는 ‘살아있는’, 그리고 ‘사실적으로’ 경험되는 복합적인 사회문제이다. 자살의 위험요인 제1순위는 단연코 빈곤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빈곤은 앞서 Vranken의 정의를 빌어 이야기한 것처럼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이기보다 취약한 개인과 복잡하고 미숙한 사회구조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배제에서 비롯된 불신, 분노, 그리고 절망(hopelessness)의 문제이다. 따라서 빈곤이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또한 한 개인의 생명을 좌우하는 기제로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경험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으로서가 아니라 빈곤이 발생, 진행되고 자살로 종결되는 과정에서 배제적 요소가 어떻게 관여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1> 자살경로: 불충족의 경험과정
위 그림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첫 번째, 불충족의 상황 절박하게 경험되는 사례들을 보면 대체로 노인, 장애인, 농어민, 실업자, 노동자, 저임금 및 비정규직 근로자 등 지역, 계층, 직종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변화, 자극에 쉽게 취약해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쉽게 빈곤위기에 처하기도 하였고, 위기로부터 탄력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내외적인 여건, 즉 자신의 문제대처능력에 대한 확신, 혹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가족이나 친인척, 친구 등의 지원가능성 역시 취약한 경우가 많은데, 이 취약성은 이들의 평균 수입정도, 학력, 성공 경험수준, 사회적 자아에 대한 자신감 등이 대체로 낮은 데서 비롯된다고 많은 연구자들이 보고하고 있으나 질적인 측면에서 엄밀히 보자면 이러한 조건자체의 영향력보다는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된 사회의 불인정, 편견, 낙인, 공격적인 계층구분과 같은 배제의 속성들이 이들의 생애동안 축적되면서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사회적 배제를 초래하는 시발점에 불충족, 빈곤에 대한 사회의 엄격한 계층성이 작용하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불충족의 반복적인 순환구조에는 또 다시 배제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들의 불충족과 배제에 사회 안전망 기능이 너무나 경직되고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가끔 계층삼겹이라 빗대어 말하는 것이 있다. 우리 사회엔 세 개의 계층이 있다. 제1계층은 살코기같은 양질의 부(富)로 완전독립적인 생활을 실현한 계층, 제2계층은 불충분의 정도가 심각해 국가의 보호체계 안에서 장기적이고 포괄적으로 인큐베이팅되는 계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호체계에서도 제외되고, 독립의 안정성도 보장하기 어려운 제3계층이 그것이다.
최근 들어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 복지 사각지대라는 용어가 여러 번 등장한 바 있다. 사각지대가 갖는 위험성은 쉽게 발견되지 않고, 기존의 체계에서 어느 정도 탄력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거가 미약하다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복지 논의에서 항상 제외되었던 계층이 바로 제3계층이었다. 이들은 보편적 복지의 광범한 전개 체계 내에서도 여전히 불특정 다수였고, 사각지대였다. 이들의 위기는 일시적인 보상이나 제도권 밖의 이슈로 다뤄졌기 때문에, 이들이 다시 서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대안 모색은 상대적으로 매우 소극적이었다.
우리가 빈곤에 대해 논할 때를 생각해보자, 매년 폭설과 폭우로 어렵게 지은 농사를 뒤엎어야하는 노인농부의 입장을, 구제역으로 자식같던 소, 돼지들을 잃고 다시는 축산을 하지 않겠노라 고향을 떠나 어찌어찌하다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을, 정규직 임금의 70%를 받으며 두 세배 일을 감당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다 자살을 시도한 어느 청년의 입장을 생각해보았는가? 사람들은 보상을 받지 않았느냐, 해고에 맞서기보다는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직장을 구해보지..라고 이야기한다 했다. 어떤 전문가들은 정책이란 것이 이러한 세세한 사례까지 고려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했다. 언론은 이런 일들이 매년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사건처럼 보도하고 잊어버리고 보도하고 잊어버리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건이 우선인 보도를 한다 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을 지원할 국가 역시 결과적으로 숲에 살충제를 뿌리는데, 막상 그 살충제가 보호해야할 나무의 상태는 알지 못하는 모순을 초래하는 것이다.
자살은 사회적 차원에서 고려하고 대처해야 할 사회문제
세 번째, 불충족과 배제의 순환구조는 건강했던 사회구성원들에게 사회적 분노, 그리고 절망을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 막연하게 자신을 ‘서민, 중산층’으로 인식해온 기존에 ‘건강했던’ 사회 구성원들이 막상 자신의 위기상황에서는 사회의 지원, 보호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불이익을 초래하거나 자신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을 반복, 지속해서 경험하게 될 경우, 이들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은 매우 크고도 절대적인 강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사회 저변에 역동하는 불충족의 문제와 배제가 자신이 통제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막강한 장벽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자신 삶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 미래에 대한 확신, 삶에 대한 동기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정신질환과 같은 정신병리적 요인에 의한 자살 이외에 상당히 많은 자살의 경우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죽음 뒤엔 이러한 사회적 보호와 대처의 무능, 방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공격성들이 노련하게 기능하고 있기에 자살은 사회적 차원에서 고려하고 대처해야할 사회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대처의 중심에는 우리 사회의 만성적인 빈곤과, 너무나 익숙해진 병리, 즉 비판하면서도 사회는 변하지 않을 거란 왜곡된 확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여진 사회적 배제, 불평등의 이슈가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대처되어야한다.
열심히 일한다해도 자신의 노년기가 풍요로와 지리란 걸 기대하기 어렵다던 그 학생은 결국 그 학기, 그 수업의 기말고사를 치르지 못했다. 아버지보다는 나은 삶을 살겠다 다짐하며 고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그렇게 고대하던 졸업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를 잃은 것만큼 가슴 아픈 것은 그에게 매일매일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들 수 있노라고, 그 미래의 기회는 지금 빈곤하다 할지라도 이 평등한 사회가 네게 새 출발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노라고, 아직까지도 선생으로서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한 번 필자 스스로 먼저 반성하며 용기내어 우리 사회에 제안하고 싶다. 이 빈곤과 불평등 고리를 엮고 있는 그 실타래 안에는 나, 너, 우리가 모두 실 한 오라기, 한 오라기로 엮어져있는 만큼 이 불충족과 배제의 관성을 우리부터 끊어보자고! 그리고 이러한 고리에 걸린 사회적 약자를 사회복지대상자로만 보지 말고, 자립하고 독립할 수 있는 인격체로서 어떻게 다시 설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이들이 불충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배제, 불평등의 요소들이 우리에게서 강력히 통제되고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자 제안하고 싶다. 이러한 노력들이 끊이지 않고 지속될 때, 적어도 올해보다는 1년 후, 1년 후보다는 5년 후, 그리고 10년 후에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논의를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더 바라기는 더 이상 이 빈곤과 불평등의 상처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희망해본다. E21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