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 육성 차원에서도 자사주 매입 한도‐스톡옵션 행사 요건 강화해야
올해 들어 자기주식(자사주) 취득공시를 내는 상장법인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10월 들어 증가세가 부쩍 늘었다. 11월15일 한국거래소 전자공시를 보면, 코스피․코스닥 상장법인 107곳이 지난 10월 이후 자사주 매입 계획을 내놨다. 올 8~9월 41곳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넘게 늘어난 규모다. 코스피가 33곳, 코스닥이 74곳이다.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 대한방직, 삼익악기, 나이스정보통신, 인터파크 등의 기업들이다.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올해 10월까지 자사주 매입 규모는 3조4천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5500억원(삼성전자 포함 9조4700억원)의 5배가 넘는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8조9천억원, 올해 9천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했다.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한 규모도 1조2700억원으로 지난해 1800억원보다 7배 가까이 늘어났다.
자사주 매입과 소각의 증가는 10월 들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 계획 발표의 여파로 국내는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주가가 크게 하락한 사정과 관련된다. 코스피와 코스닥은 10월 각각 13.37%, 21.11% 내렸다. 자사주를 매입하면 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수가 줄어들어 주가가 오르고, 당기순이익을 유통되는 보통주 수로 나눈 주당순이익(EPS; earnin per share)도 덩달아 오르기 마련이다.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사주 매입 계획을 마련한 기업들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주가 상승 부르는 자사주 매입의 달콤한 유혹
투자자들로서는 주가가 오르는 자사주 매입을 마다할 리 없다. 무엇보다 기존 주주들은 기대되는 주가 상승을 통해 이전에 발생한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을 만회하거나 이득을 보면서 주식을 팔고 떠나는 출구전략을 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주가 상승을 기대해 새로운 주식 투자자들이 몰리는 효과도 발생한다. 그러니 아예 대놓고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는 투자자들도 있다.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행동주의’를 내건 대표적인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최근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요구하고 있는 자사주 매입 요구가 대표적이다. 현대차가 8조~10조원, 현대모비스가 4조~6조원 초과자본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만큼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 처리하라는 요구다. 매입에 필요한 자금은 부동산 등 모든 비핵심 자산을 팔아서 마련하라고 제시한다.
어떤 기업들은 가치 창출을 위한 향후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자사주 매입을 이용하기도 한다. 지난 11월14일 3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발표한 컴투스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삼성증권과 미래에셋대우를 통해 3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취득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면서 “새로운 글로벌 대작 게임들을 지속적으로 서비스하는 것을 통해 성장성을 더 높여간다는 자신감으로 자사주 취득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향후 게임 서비스들이 흥행을 거둘 거라는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자사주 매입을 동원했다는 얘기다.
혁신 투자 필요한 현대차에 자사주 12조원 사들이라는 엘리엇
여기까지만 봐도 자사주 매입에 대한 개인적 찬반을 떠나, 한 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자사주 매입은 그 자체로 기업의 가치 창출(creation)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미 창출돼 기업 내부에 쌓여 있는 가치의 추출(extraction)에 가깝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조지프 슘페터가 밝힌 것처럼, 기업이 가치창출 능력을 높이려면 새로운 생산물이나 공정, 새로운 시장의 개척 등과 같은 ‘혁신’에 투자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 자사주 매입은 이와 무관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급증하는 자사주 매입 속에서 정부가 강조하는 ‘혁신성장’이 일어날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진다.
특히, 실적 부진이 시달리며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성이 높은 기업과 자사주 매입은 어울리지 않는다. 연구․개발의 박차, 조직적 학습능력의 개선, 가치사슬 이완 방지 등에 쓸 수 있는 자금을 집행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이 1% 남짓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하라는 엘리엇의 요구에 ‘제정신이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모든 비핵심 자산을 팔아서 자사주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라는 방향까지 제시하는 친절(?)을 현대차에 베푸는 것도 이런 차가운 반응과 분리하기 어렵다. 엘리엇의 적나라한 속내는 현대차에 투자했다가 본 손해 5천억원을 만회하는 데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설사 그렇게 현대차가 자금을 마련한다고 해도 자사주 매입에 쓰는 건 온당하지 않다는 얘기다. 현대차가 지난 4월 4100억원 아치의 자사주를 취득해 소각한 것이 바람직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사주 매입 그 자체가 기업의 가치창출에 기여하지 않음에도, 자사주 매입을 정당화시키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주장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책임경영 강화’와 ‘주주가치 제고’라는 이름에서다. 두 가지 모두 ‘주주의 이해를 무시하는 경영진은 내몰린다’는 규율을 확립하는 것과 연관된다. 여기에는 자사주 매입은 주주의 이해를 높이는 행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경영진이 주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는 게 주주 배당을 늘리고 경영진에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을 주는 것이다. 근거는 스톡옵션을 통해 보상을 받으려면 경영진도 주주와 마찬가지로 주가를 높이는 데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사 자산의 합법적 약탈 수단이 된 미국의 자사주 매입
문제는 ‘주주 주권’과 ‘주주가치 극대화’를 기본으로 하는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이 그리 정상적이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 2007~2016년 10년 동안 비금융기업의 주식 순발행액은 연 평균 -4120억달러(약 -478조원)이었다. 미국 국내총생산 대비 2.65%에 해당하는 자금이 자사주 매입을 통한 소각 처리, 기존 기업의 인수․합병에 투입됐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미국 기업 자산에 대한 합법적 약탈’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제기돼 왔다. 자사주 매입과 경영진에 대한 스톡옵션 부여가 기업의 가치를 새로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으로부터 기존 가치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는 얘기다.
실제로, 자사주 매입은 주식시장을 통한 기업의 자금 조달에 기여한 주주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이 아니다. 삼성전자와 세계 스마트폰 단말기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애플의 예로 살펴보면, 애플은 1980년 주식시장 기업공개를 통해 9700만달러를 자금을 단 한 차례 조달했다. 현재 애플의 주주 대부분은 이때 자금을 제공한 이들과는 거리가 멀다. 거래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지 애플의 가치 창출에 기여한 바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애플이 창출한 가치를 주주들에게 돌려준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플은 ‘자본 환원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2012년 4분기부터 2018년 3분기까지 2390억달러 어치의 자사주를 매입했고, 744억달러를 배당으로 지급했다. 자사주 매입 규모가 배당의 3배가 넘는 것이다.
주가가 하락하면 규모에 관계없이 자사주를 매입하며 주가 부양에 나서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국내에서 이런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을 남의 일로만 보기는 어렵다. 관련 대책이 시급히 마련될 필요가 있다. 금융위원회가 사모펀드를 육성해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의 인수금융을 키워 중장기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모펀드 육성은 결국 기업공개를 통한 투자자의 자금 회수라는 단계를 거치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사모펀드들은 자신이 자금을 투자한 기업들의 주가 관리를 강하게 요구하는 이해관계를 갖게 되기 쉽다. 자사주 매입에 대한 요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생기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회사 자산의 합법적 약탈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자사주 매입이 횡행한 데는 제도의 결함이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자사주 매입과 관련한 이른바 ‘10b-18'이라는 규정을 1982년 도입했다. ‘매입 이전 4주 동안의 일 평균거래량의 25% 이내’로 자사주 매입 상한선을 넉넉하게 설정하는 내용이다. 이 규정의 도입으로 기업들의 대규모 자사주 매입은 날개를 달았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사주 매입은 불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규모 자사주 매입은 주가 조작 혐의로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을 것을 우려해 기업들은 자제했다. 미국 증권거래소법은 ‘ 자금력을 이용해 주가 조작을 하는 시세조종’을 거래에 기초한(trading-based) 주가 조작으로 규정하고 있다.
얼마든지 가능하게 해놓고 법으론 자사주 매입은 주가 조작 아니다?
국내의 경우도 사정은 미국과 비슷하다. 아니 미국보다 훨씬 더 자사주 매입에 관대하다.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은 아예 주가 조작의 적용 대상에서 자사주 매입을 제외하고 있다. 현실은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가를 얼마든지 끌어올릴 수 있게끔 돼 있다. 금융위원회가 고시한 행정규칙은 자사주 1일 매수주문수량은 사들이고자 하는 주식수의 10% 또는 이사회의 결의일로부터 1개월 간 일 평균거래량의 25% 중 많은 수량 이내에서 얼마든지 매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자사주 매입의 실탄도 넉넉하게 허용한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자기자본(순자산)에서 법정준비금을 제외한 나머지 한도 안에서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 다툼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배당을 하지 않고 자사주를 매입해도 상관이 없다(자본시장법 제165조의3 제2항).
심각한 제도의 결함이다. ‘주주 행동주의’라는 미명 아래 투기펀드 엘리엇이 현대차도 12조~14조원 아치의 자사주를 사들이라고 황당한 요구도 이런 제도의 결함과 무관하지 않다. 주가 조작의 대상에서 자사주 매입을 원천 배제한다면, 지나치게 관대한 1일 자사주 매수량은 엄격하게 제한할 필요가 있다. 자사주 매입을 주가 조작 적용 대상에서 배제한다고 해서, 과다한 자사주 매입이 투자자들의 쏠림 현상을 낳아 주가 급등을 부추기는 왜곡 효과를 낳는 현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익배당을 하지 않고 자사주 매입을 허용하는 행위는 금지하는 것이 맞다. 스톡옵션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높이기 위해 경영진이 자사주 매입을 동원하는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관련 현행 규제는 너무 느슨하다. 스톡옵션 행사에 따라 자사주를 교부해야 할 경우,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날짜가 이미 도래했거나 석 달 안에 도래할 경우 스톡옵션 행사량 내에서 자사주를 취득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이사회가 연속으로 이런 결의를 하지 못하도록 한 게 거의 전부다. 뒤집어보면 석 달 이상만 남겨두면 얼마든지 자사주를 사들여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고, 두 번에 한 번씩 이사회를 열어 관련 결의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남용을 예방하려면 자사주 매입 이후 일정한 기간(예를 들어 2~3년)이 흐른 뒤 스톡옵션 행사가 가능하도록 하는 요건을 신설해야 한다.
자본조달 일환의 자사주 매입․소각 공시 강화해야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는 일환으로 자사주 매입과 소각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주가가 주식 이외의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본조달 비용을 높이는 때다. 이런 자사주 매입과 소각은 분명한 목적과 용도를 밝히도록 공시요건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단순한 저축자와 투자자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저축자’는 거래되는 주식을 일시적으로 보유하면서 매매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익배당이나 시세차익을 통해 자본이득을 얻으려는 대부분의 주식 투자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투자자’는 기업에 중장기 자금을 공급하면서 금융 헌신을 하는 제공하는 성격을 갖는다. 기존에는 기업대출을 하는 은행이 투자자의 주류를 이뤘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회사채 인수금융 활성화를 통해 사모펀드를 또 다른 투자자로 육성하고자 한다. 사모펀드는 자금 회수를 위해 자사주 매입을 부추기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총수일가 일감몰아주기에 보듯이, 창업자 일가로 불리는 재벌들은 기업 규모에 관계없이 회사 승계를 위한 자금 마련 등의 목적으로 회사 자산을 직․간접적 약탈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사주 매입과 연동되어 스톡옵션은 경영진에 대한 주요한 보상 방식으로 확대되어 간다. 창업자 겸 장기 투자자인 재벌 가문은 자사주 매입을 통한 주가 상승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자본금 30억원 이상 기업 중 스톡옵션 도입한 곳은 2006년 898곳에서 지난해 1080곳으로 증가했고, 정보통신업과 금융보험업에서 이 도입 비중은 거의 20%에 육박한다.
미국 자본주의에서처럼, 국내에서도 자사주 매입과 스톡옵션이 ‘회사 자산의 합법적 약탈’ 수단으로 변질되는 문제점이 확산될 유인과 이해상충은 도처에 널려 있다는 얘기다. 공매도의 문제점을 뭉개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올해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같은 잘못이 되풀이돼서는 안 될 일이다. 자사주 매입 관련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사모펀드가 정부가 강조하는 ‘혁신성장’을 위한 투자자로 기능하기 위래서라도 그렇다. 횡행하는 자사주 매입 속에 혁신성장이 가능할까? 긍정은 지나치게 순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