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행복의 경제적 조건

2013-02-25     윤종인 백석대 교수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미 알고 있는 듯하지만 막상 답변하려니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바와 같이, 행복이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 두는 것이 좋겠다.

행복이 정치적 슬로건이 된 상황은 한편으로 자연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하다. 행복이란 궁극적인 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 노력까지 동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를 들곤 한다. 경제적 여건이 국민의 불행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을 위해 어떤 경제적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이스털린의 역설

1974년 미국의 경제학자 리차드 이스털린(Ric hard A. Easterlin)은 “경제성장만으로 국민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내용의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논문의 주요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같은 나라 안에서는 소득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국가간 비교에서는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의 국민일수록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나라 안에서 비교할 때와 국가 간에 비교할 때 행복과 소득의 관계가 달랐던 셈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두 번째 결론이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이 1860달러인 서독, 1027달러인 이스라엘, 613달러인 일본의 행복도가 375달러인 브라질, 371달러인 파나마, 282달러인 필리핀, 심지어 134달러인 나이지리아의 행복도와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스털린은 국가간 비교에서 14개국의 조사결과를 이용했다.

경제학자들도 소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는 않는다. 경제학자들이 경제활동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효용(utility) 또는 사회후생(social welfare)의 극대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이 소득을 중시하는 이유는 효용과 사회후생이 소득의 함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소득이 많을수록 효용과 사회후생이 크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스털린의 두 번째 결론은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인당 국민소득이 많다고 해서 사회후생이 크지는 않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불렀고 이 역설을 둘러싼 논쟁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행복과 소득의 관계에 대한 논쟁

이스털린의 논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어떻게 행복을 측정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연구 이후 행복의 경제학(Economics of H appiness)이라는 분야가 등장하였으며 , 행복을 측정하는 방법은 이 분야에서 당연히 중심적인 이슈가 되었다.

행복을 측정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만 언급하더라도 복지(well-being), 삶
의 질(quality of life), 삶의 만족도(satisfaction with life index)와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 : GNH) 등이 있다. 이 개념들은 모두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것으로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쏟아지기 이전부터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논의되어 왔던 것들이다 .

사회과학연구에서 학자들의 견해가 만장일치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최근의 다수 연구는 이스털린과 다른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벳시 스티븐슨(Be tsey
Stevenson)과 저스틴 울퍼스(Jus tin Wolfers )의 2008년 연구를 들 수 있다. 논문의 제목은 ‘소득과 주관적인 복지에 관한 정형화된 사실(The New Stylized Facts about Income and Subjective W ell-Being)’이었으며 이스털린보다 훨씬 더 많은 122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이스털린의 것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대비할 수 있다. 첫째 같은 나라 안에서는 소득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국가간 비교에서도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의 국민일수록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비교 모두에서 주관적 복지는 소득수준에 비례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는 많다. 미국 펜실바니아대학교의 워튼스쿨은 삶의 만족도지수를 조사하여 발표하는데,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삶의 만족도는 소득의 절대적 수준과 비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행복의 양적 측정이 어렵기 때문에 객관적인 지표를 비교하는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소득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만족도의 객관적 지표인 평균수명, 문자해독률, 인터넷 이용인구비율 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행복의 경제적 요인

행복을 좌우하는 요인에는 경제적인 요인과 비경제적인 요인이 있다 . 비경제적인 요인으로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건강, 가족 및 친구, 명예, 종교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의외로 받아들일 만한 것은 이성관계가 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70대 노인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
화이었는데 이들에게 성이 얼마나 중요한 관심사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어쨌든 이 글의 관심사는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요인이다. 물론 소득이 행복의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스털린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소득의 함수이고 소득의 절대적 수준이 높을수록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득이 행복의 충분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소득의 절대적 수준이 높을수록 행복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소득의 절대적 수준 이외에 행복을 좌우하는 경제적 요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소득 못지않게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다. 아무리 많은 소득을 번다고 해도 이를 비합리적으로 쓴다면 행복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소득이 적은 사람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적은 소득이라도 합리적으로 지출한다면 부자들 못지않은 행복을 누릴 수 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부자들처럼 소비하려 한다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혹독한 노 년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저소득층에게 합리적 선택은 실천이 어렵기에 더욱 절실한 덕목이다.

둘째, 행복은 소득의 상대적 수준에 의존한다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하면 소득분배 또는 빈부격차가 국민의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소득이 5만 달러일 때와 10만 달러일 때 언제 더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였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바꾸었다. 당신의 소득은 5만 달러이고 다른 사람의 소득은 2만5000 달러일 때와 당신의 소득은 10만 달러이고 다른 사람의 소득은 20만 달러일 때 언제 더 행복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짐작할 수 있겠지만 당시 실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나의 소득이 적더라도 다른 사람의 소득보다 많기만 하다면 더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실험결과는 소득의 절대적 수준보다 상대적 수준이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소득의 증가율이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예를 들이 1 인당 국민소득이 1000 달러에서 2000달러가 될 때 행복하다고 느꼈던 국민들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1만1000달러가 될 때 불행하다고 느낀다. 이는 국민소득의 수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민소득의 증가율, 즉 경제성장률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0%를 넘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대로만 간다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일본을 따라잡을 거야”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률이 정체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넷째, 고용이다. 고용은 행복을 증가시키지만 그 반대인 실업은 행복을 감소시킨다. 물론 금전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실업은 직장이 없어 소득이 없다는 뜻이다. 소득이 없으므로 행복의 경제적 요소를 갖추지 못한 셈이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

하지만 실업은 금전적인 문제 이상의 고통을 안겨 준다. 실업자는 패배감, 고독과 사회와의 단절, 자긍심의 추락 등 매우 심각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당시 어떤 실직자가 방송에서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결혼할 때 직장동료들 모두가 축하해 주었고, 신혼 집들이에도 가장 먼저 직장동료들을 초대했다. 첫아이 돌잔치에도 직장동료들이 와주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리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직장생활이란 돈벌이가 아니라 인생이다.”

최근 청년층의 취업난과 중장년층의 고용불안은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간주될 만하다.

한국인은 얼마나 행복한가?

앞에서 미국 펜실바니아대학교의 조사결과를 인용한 바 있다. 이외에도 행복에 대한 조사결과는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34개 회원국 국민들의 ‘행복지수(Better Life Initiative)’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호주, 캐나다, 스웨덴 등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의 행복지수는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 그리스, 포르투갈, 멕시코, 터키 등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의 행복지수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수준은 분명히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34개 회원국 중 26위를 차지했는데 이탈리아와 폴란드보다 조금 낮고 그리스와 슬로바키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선진국클럽임에 비추어 높은 순위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와 비슷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은 아무래도 실망스럽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1인당 국민소득에 걸맞지 않게 삶의 만족도가 낮은 편일까?

한국인의 낮은 행복지수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경제적인 요인들도 큰 몫을 한다.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대책도 절실하다. 하지만 경제적 요인에 국한하여 생각한다면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선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걱정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브랜드의 옷이 잘 팔리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할 때가 많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위신과 평판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알려진 바와 달리 우리나라의 소득분배는 현재까지도 꽤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분배는 서서히 악화되어 왔다. 아직까지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체감하는 정도는 실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듯하다. 최근 복지정책이 정치적 화두가 되었는데 이 논의가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경제성장의 문제는 특별히 중요하다. 하지만 국내외적 여건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대외적 요인이 개선되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또한 대내적 요인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외환위기 이후 잠재성장률이 서서히 하락하였는데 이에 대한 뾰족한 대책도 찾기 어렵다. 게다가 머지않아 시작될 고령화의 그늘이 걱정을 더한다. 이처럼 경제성장전망이 불확실한 탓에 고용의 개선을 기대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을 목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고소득만을 목표로 쉬지 않고 달려 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식의 전환과 함께 새로운 시도들도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므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문제제기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타협하는 용기도 필요하며 이를 통하여 논쟁에서 합의에 이르는 사회적 분위기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온 국민이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다.

※윤종인 교수는 1990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학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졸업(박사)하고 1999년부터 현재까지 백석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대한경영학회 이사, 한국산학기술학회 이사를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