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보험 통합’에서 ‘건강보험 하나로’까지
우리나라에서 강제가입을 규정한 법정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77년 7월 1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장의 근로자들과 공업단지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현대적 의미의 의료보장제도를 처음 실시했는데, 이때 500인 이상 고용사업장에 19개의 조합과 공업단지 내 사업장에 486개의 조합 등 500개가 넘는 직장의료보험 조합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1977년 당시 이들 조합들은 단지 310만 명의 인구만을 포괄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8.8%에 불과했다.
박정희의 법정 의료보험: 보통사람들을 사각지대에 방치
그러면 당시 90%가 넘는 대한민국의 나머지 대다수 인구는? 대책이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대다수의 서민과 보통사람들은 의료보장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다. 해법은 분명했다. 법정 의료보험제도가 포괄하는 인구를 확대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먼저, 1979년 1월 1일부터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공무원과 교직원 및 그 가족 등 약 266만 명이 의료보험제도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 1979년 7월 1일부터는 300인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장도 법정 의료보험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직장의료보험의 적용대상이 확대되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보통사람에 속하는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공적 의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어려운 사람들은 병원의 경제적 문턱이 높아서 병원에 가지 못했고,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정부는 직장의료보험의 적용대상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1981년 1월에는 100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을, 1982년 12월에는 16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을, 그리고 1988년 7월에는 5인 이상을 고용하는 소규모 사업장에 이르기까지 의료보험제도를 적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임노동 관계에 속하지 않은 농어촌과 도시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소득의 격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소득의 파악도 매우 어려웠다. 당시 이들 주민들은 의료보험의 혜택은 환영했지만 가난한 형편 때문에 매달 의료보험료를 납부하는 데 대해서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의료이용에서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인과 적용되지 않는 지역주민들 간의 격차 상황을 이렇게 10년이 넘도록 계속 방치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1988년 1월 1일 138개의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농어촌 지역의료보험을 실시했고, 1989년 7월 1일부터 117개의 의료보험조합을 통해 도시 지역의료보험을 실시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에서 처음으로, 1977년 7월 법정 의료보험제도로 직장의료보험을 실시한 지 12년 만에 모든 국민을 공적 의료보험제도에 포괄하게 된 것이다. 비록 보장성의 수준은 낮았지만 그래도 모든 국민에게 의료보험증을 나눠주게 되었고, 병원의 경제적 문턱은 그렇게 낮아졌다. 이것은 우리나라 복지제도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성공 사례에 속한다. 보편주의 원칙의 첫 번째 내용인 ‘보편적 가입’이 제도적으로 처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89년 의료보험체제: 조합주의의 구조적 결함
그런데 1989년 7월에 달성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는 중요한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의료기관에서 진료시점에 환자가 직접 부담해야 하는 본인부담금의 비중이 너무 높았다. 당시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용을 포함한 환자 본인부담 의료비의 비율이 거의 60%에 달했다. 이렇게 보장성 수준이 낮았던 것은 당시 국민들에게 의료보험료를 너무 적게 징수했고, 이에 더해서 정부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재정지원 규모도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저부담-저급여’ 유형이 구축되었는데, 이는 저소득 계층에게 매우 불리했다.
본인부담금은 의료이용을 가로막는 경제적 장벽이다. 부자들에게는 이 장벽이 별 것이 아니겠지만, 빈자들에게는 의료기관 방문과 입원을 가로 막는다. 의료보험제도가 의료이용을 경제적 장벽을 낮추어서 소득계층 간의 의료이용의 격차를 줄여주어야 함에도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의료보험재정이 필요하고, 그래서 보장성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결국 의료보험료를 더 징수해야 하고, 정부의 재정지원도 늘려야 한다. 그런데 1989년 모델인 조합주의 방식으로는 이것이 어렵다. 당시 400개가 넘는 의료보험조합들 간에는 재정격차가 너무 심각했다. 어떤 조합은 너무 가난해서 늘 적자였고, 어떤 조합은 매우 부유해서 적립금이 넘쳐났다. 구조적 차원의 문제였다.
둘째,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는 구조적으로 조합 단위로 나뉘어져 있어서 사회연대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범위가 매우 협소하다. 1990년 당시 인구의 10.8%를 포괄하던 '공무원 교직원 의료보험관리공단‘이 하나의 거대 조합이었고, 인구의 37.8%를 포괄하던 직장의료보험조합은 154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인구의 45.3%를 포괄하던 지역의료보험조합은 254개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합주의 방식은 국민간의 사회연대성의 범위가 해당 조합 내에만 머물고, 위험 분산의 범위가 좁아서 사회보험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더해, 관리운영의 비효율도 심각했다.
그래서 1989년 7월 탄생한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는 통합운동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이 운동은 이후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조합주의 의료보험을 하나의 공적 보험자로 통합하자는 내용의 의료보험 통합운동은 점차 국민의 지지를 얻어갔다. 특히 농어촌과 도시의 보통사람들이 통합운동을 지지했다. 여기에 민주노총이 강력하게 결합했다. 국민의 다수가 의료보험 통합을 지지함에 따라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11월 국회에서 ‘국민의료보험법’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227개 지역의료보험조합과 ‘공무원 교직원 의료보험관리공단’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이 법은 김대중 정부 시기였던 1998년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출범: 대한민국 의료보장의 역사적 사건
이제 140개의 직장의료보험조합을 통합할 차례가 왔다. 김대중 정부는 의료보험 완전 통합이라는 대선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국회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전경련 같은 사용자 단체 뿐만 아니라 직장의료보험 노동조합과 한국노총이 거세게 통합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진통을 거쳐 마침내 1999년 10월 국민건강보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래서 2000년 7월 1일부로 통합의료보험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출범했다.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간에 나뉘어져 있던 보험재정은 2003년 7월 1일부터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통합의료보험제도인 국민건강보험은 조직과 재정의 양면에서 완전한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1989년 성립된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가 수많은 논란과 갈들을 겪으면서 2003년 완전한 통합을 이룬 것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복지의 역사에서 거대한 사건이다. 첫째, 1990년 409개로 나뉘어져 있던 위험분산의 범위가 하나로 합쳐졌다. 이는 사회연대성의 범위가 개별 조합의 단위에서 국가 단위로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둘째, 통합을 통해서 건강보험료의 부담이 공평해졌다. 셋째, 부자가 빈자를 돕는 소득재분배 기능이 강해졌다. 넷째, 관리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졌다. 다섯째, 정부의 재정적 책임성이 강해졌으므로 의료보장제도의 공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우리나라는 1977년에 전체 인구의 8.8%만을 포괄하는 협소한 법정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지만. 12년만인 1989년, 전 국민을 포괄하는 조합주의 의료보험제도를 완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통합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냄으로써 여야 합의에 의해 통합주의 의료보험제도인 현행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창설했다. 그 결과, 40% 수준이던 의료보험의 보장성이 통합 직후인 2002년 52.4%로 급등했다. 이후 참여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2006년에는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64.3%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거대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추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 대신에 의료민영화 이슈가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우리를 괴롭혔다. 그리고 이런 불행한 상황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은 제자리를 맴돌고 의료민영화 추진의 파고만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많은 공약을 했지만, 지금 대부분은 폐기되고 말았다.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약속이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여야지, 왜 하필이면 4대 중증질환이냐”는 반대자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던 공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공약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특진비라 불리는 선택진료비용, 차액병실료, 간병료 등 3대 비급여가 환자 가족의 큰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의료서비스 부분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의 의료불안은 여전히 심각한다. 1989년 달성된 조합주의 의료보험체제에서 의료보험의 보장성 수준은 40%에 불과했으나, 통합 이후 단계적으로 높아져서 2006년에는 64.3%까지 도달했다. 이런 추세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평균 수준인 85%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대신 이들은 의료민영화를 대안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올바른 해법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길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 해법은 바로 “건강보험 하나로”이다. 우리 국민은 국민건강보험에 보편적으로 가입되어 있음에도 의료비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보장성 부족으로 인해 의료서비스 이용 시점에서 지불해야 할 본인부담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건강보험이 있음에도 자구책으로 대다수(20세 이상 성인의 약 70%)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유럽 복지국가들에서는 국가의 공적의료보장으로 의료비의 대부분이 해결되므로 민간의료보험에 별도로 가입할 필요가 없고, 가계의 이중부담과 소득계층 간 의료이용의 형평성 문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의료보장 분야의 정책적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의료서비스 이용 시점에서 온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실질적으로 없애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적 의료비 조달장치인 국민건강보험의 재정규모를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OECD 국가들 평균 수준에 도달하도록 우리도 국민건강보험료를 지금보다 더 내면 된다. 그래서 ‘저부담-저급여’ 체계를 ‘적정부담-적정급여’의 국민건강보험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중산층과 서민 등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며, 동시에 사회연대성을 높여주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에도 기여한다.
2010년 7월 17일 공식 출범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는 줄곧 ‘국민건강보험료 더 내기’ 운동을 해왔다. 현재 우리가 내고 있는 건강보험료, 사용자(기업) 부담 건강보험료, 정부의 국고지원 등 국민건강보험 재정 부담 3주체 모두가 지금 내는 건강보험료 보다 더 부담하고, 이렇게 마련된 재정으로 OECD 국가들 평균 수준의 보장성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지금 내고 있는 건강보험료의 25%를 더 내면 된다. 현재 건강보험료로 매달 20만원을 내는 사람은 25만원을 내면 된다. 매달 4만원을 내는 사람은 1만원을 더 내면 된다. 이렇게 하면 현재 약 43조원인 연간 국민건강보험재정이 15조원 더 늘어난다.
이 돈이면 충분하다. 첫째, ‘입원진료 보장률 90%’를 달성할 수 있다.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차액을 포함한 입원 분야 비급여 진료의 전면적인 건강보험 급여화가 가능해진다. 둘째, ‘연간 본인부담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를 실시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간병의 급여화’에 소요되는 재정도 충당할 수 있게 된다. 넷째, 노인틀니, 치석제거 급여 확대 등 ‘치과진료 분야’의 보장성 강화도 가능하다. 이에 더해, ‘의료사각지대의 해소’를 위해 최하위 5% 소득계층에 대한 건강보험료 면제도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