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 지상중계] 진보개혁진영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며
본지가 주관해 2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제1회 목촌포럼] 새로운 정치를 위한 열린 토론회' 발표문을 지상중계합니다. 량이 많지만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문을 게재합니다.
1. 들어가며: 분열과 갈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
끊임없이 우리는 전환의 시대라는 의미를 강조해온 바 있다. 언론과 식자들은 한목소리로 대전환의 시대에 적응하고 새롭게 등장한 도전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고 있고 어떤 도전들이 닥쳐왔는지 그 해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는 일은 대단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20대 대통령선거라는 좋은 기회를 맞고서도 실패했다. 승자와 패자만 있고 선거과정에서 차려진 토론과 숙의의 기회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현재 윤석렬정부다. 검찰과 경찰, 군과 금감원 등 소위 권력기관들을 장악하고, 윤석렬 대통령을 중심으로 집권여당내 위계를 다시 세우는 일과 탈원전을 비롯해 몇가지 상징적인 전 정부정책을 뒤집는 거 빼놓고 우리 사회를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국내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위기라 할 만한 상황이다. 촛불혁명이 끝난 후 채 5년이 되지 못해 민주주의의 위기라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촛불혁명은 시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우리사회는 통합적 정치를 통한 민주주의의 성숙으로 이끌려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와 진영 간의 무분별한 싸움으로 인해 오히려 극단적인 분열과 갈등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소위 조국사태로 인한 광장의 분열이 그 대표적인 모습일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속에 금리상승과 원자재값 상승, 물가불안 등으로 경제적 약자의 삶은 더 힘들어지고 있다.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투쟁에서 보았듯이 고질적인 원하청관계의 불공정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숙제로 남았다. 나아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지식집약적 산업의 대세 속에 플랫폼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독과점의 심화. 그 한편에 양극화의 지속적인 심화가 있다 할 것이다. 이런 경향은 사람들을 더욱 즉물적이고 즉흥적이며 경쟁지향적으로 만들고 여기에 정치적으로 고양된 진영갈등은 사회적 합의의 경험이 일천한 우리 사회를 끊임없는 갈등유발형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다. 이런 경향은 정치에 영향을 끼쳐 포퓰리즘 정치를 더욱 가속시킬 것이다.
과연 민주당은 이런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특히 586정치는 한국정치를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촛불혁명이후 더욱 양적으로 확장된 민주시민사회 역시 현 정치사회적 위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을텐데 무얼 할 수 있나? 이런 의문에 어떻게든 답을 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이런 위기속에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두차례의 큰 선거를 패배하고 나서도 아무도 이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위기상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 기존 586정치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나?
여기서 586정치는 특정인을 지칭한 말이 아니라 진보개혁진영 중 민주화운동, 시민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온 제도권내 정치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노무현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도 큰 틀에서 보면 586정치의 연장선 안에 있다 할 것이다.
586세대는 민주화의 후광을 통해 제도권 정치에 들어섰고 한국 정치 발전의 한 동력이 되었다. 김영삼정부 때부터 제도권 정치에 들어선 586은 그들이 3,40대가 되던 2000년대 들어 정점을 찍었다. 제도권 정치에 들어선 586세대는 권위주의 독재정부 이후 보수화되었던 제도권 정치를 흔들었고, 입법과 행정, 심지어는 사법의 영역에까지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변화들을 가져왔다. 소극적 복지를 기반으로 한 친기업적 정책노선 일변도에서 적극적 복지를 지향하며 친서민적 정책의 성과들을 만들어 냈으며 그간 인권을 탄압해오던 공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변화도 일구어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586정치의 한계에 대한 논의와 비판은 제법 오래된 이슈 가운데 하나이다. 가깝게는 2020년 '조국 사태'와 서울·부산시장 성추행 대응 과정에서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민심 이반을 겪은 민주당은 당시 당 내 주류 정치 세대인 586 의원들에 대한 인적 쇄신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야 한다는 자성론이 강하게 일었던 적도 있으나 코로나로 인해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이번 20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586정치는 스스로 한계에 부딪혔음을 선언하게 되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는 586정치와 문재인으로 대표되는 관념적 아마추어리즘의 혼합정부였고 그 결과는 5년만에 정권을 내주었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586정치의 한계
실제 586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의 핵심 주류였다. 민주당에는 '586 민주화 엘리트'로 평가받는 의원들만 60여 명에 달한다. 대표적으로 송영길 민주당 전 대표와 윤호중 민주당 전 원내대표 그 뒤를 이은 우상화 비대위원장과 박홍근 원내대표는 모두 586 운동권 출신이다. 또 문재인정부의 실세로 꼽히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이인영 통일부장관, 유은혜 교육부총리,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장관 등이 있다. 이밖에도 다수의 586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문재인정부와 민주당 요직에 있었다. 그런 민주당은 지난 20대 대선 막바지에 스스로 "586 운동권 세대가 주도하는 문재인정부가 우리 지지층에게는 강력한 지지를 받지만 정권교체를 원하는 비율이 55%라는 것은 결국 중도층을 흡수하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고, 586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인 김종민의원 같은 이는 "586 용퇴론이 나온다.... 이 정치를 바꾸지 못할 것 같으면 그만두고 후배들에게 물려주든지, 정치를 계속하려면 이 정치를 확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 바도 있다.
586정치의 한계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 첫번째가 도덕적 우월성의 정치이다. 586세대에 대해 우리 사회는 관용적이었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는데 대한 586세대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다고 보여진다. 소위 군사독재정권의 엄혹한 정치환경에서 자신의 미래를 희생하였던 한 세대가 이 나라의 진보진영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에 헌신했다는 자격 하나로 586세대는 도덕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의 잣대로 우리 사회 곳곳을 재단하려 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 또한 조국 전 장관의 트윗과 페북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09년 8월 트위터에 가입한 조국은 12년 넘게 사회·정치적 트윗을 쏟아냈다. 팔로워는 무려 106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조국 전 장관이 보수 정권 시절 쏟아냈던 비난 트윗이 자신과 관련된 의혹이 터질 때마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여기에 더해서 세명의 전직 광역단체장의 성비위까지 포함하여 민주당의 도덕성은 내로남불과 위선에 무너져버렸다.
두 번째가 관념의 정치다. 586정치의 관념의 정치는 두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선의의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당위의 정치이다. 선의를 갖고 추진한 정치나 정책이기에 당연히 국민이 동의해주리라 믿는다.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힘들지, 성평등이라는 당연한 정책적 지향의 일환이었지만 페미니즘 정책으로 인해 젊은 남성들이 얼마나 박탈감을 가질 지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상 정책적 방향이 옳고 좋은 뜻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이냐 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 문제는 선의에 기초한 정치는 구체적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단히 복잡하고 모순적인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는 특정계층이나 계급의 문제를 떠나 일반 시민들의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에 대한 공감 조차 부족해 보였기에 이들이 선의를 갖고 이야기하는 ‘민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공허했다.
또 하나 관념성의 특징인 당위의 정치는 무능으로 귀결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이야기를 항상 입에 달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하는 현장의 목소리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미 가지고 있는 당위와 관념에 부합하는 목소리만 현장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였다. 당연한 듯 보인 이 문제가 많은 청년들에게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주었고, 낮은 차원의 공정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런 당위성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목표만 있고 과정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고 경직된 방식으로 정치와 정책수행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노무현정부 때 유행했던 로드맵도 없고 정책시뮬레이션에 따른 정책수정 과정은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정책집행에 수반되는 각종 리스크에 대한 대책은 보고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었던 최저임금 정책이었다. 최저임금 1만원 시대라는 당위적 목표가 최저임금 정책 추진에 경직성을 부여했고 결국은 수많은 중소상공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최저임금 수혜계층에게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결과 소득주도성장 정책 전체에 대한 평가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민주당 강령에서 까지 삭제되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세 번째가 진영논리에 갇힌 정치다. 586정치는 타도해야할 군사독재정권을 상대로 싸워온 그 시대적 한계와 앞서 언급한 도덕적 우월감으로 인해 이분법적 진영논리에 쉽게 몰두한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조국 사태와 서초동 시위, 시·도지사들의 성추행 사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적 가치를 사유화했다고 의심받는 윤미향 사건, 위성정당 사태 등을 거치며 우리 당의 도덕성과 공정성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당 내부문화가 정착돼 그때마다 강고한 진영논리로 덮이면서 민주당은 더 개혁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세력으로 인식됐다" 한 민주당 의원의 진단을 되새겨야 한다. 진영논리는 정치권 내부를 잠식해 들어가는 암과 같다. 진영내부의 건강성을 지켜나갈 비판과 토론을 거부하는 진영논리는 진영 내부의 건강을 좀먹어 들어가게 된다. 진영논리에 갇힌 정치는 결국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다. 거대 양당이 서로에게 내밷는 언사들을 살펴보면 상대는 구축해야 할 ‘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선악의 관점에서 정치를 하면 자신들과는 이해관계가 다른 세력의 주장은 악으로 규정하게 되고 또한 동류의식을 가진 집단의 부정과 부패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중적 잣대를 갖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 환경에서 정상적인 토론과 합의와 조정이라는 국회 본연의 역할을 찾는 것은 어려울 듯 하다. 그 한계가 분명하고 폐해가 명확하기에 정치권 내부에서도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자는 논의는 진즉부터 있어왔다. "절대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걸 하려면 내로남불을 하지 말고 역지사지 하면 된다""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정치가 해야 하는데 정치가 밤낮 없이 진영끼리 머리를 붙잡고 싸우는 모습 보이니 국민이 지긋지긋해 한다" 이런 비판과 논의가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네 번째가 아마추어적인 국정운영이다. 사실 중임제가 아닌 한 모든 대통령은 아마추어로 시작한다. 오랜 정치경험과 준비가 있었다 해도 당선 첫날부터 국정의 모든 것을 다 꿰뚫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노무현 청와대에서 거의 5년을 보낸 문재인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에서도 가장 국정경험이 많은 대통령이었다 할 것이다. 그런 문재인 정부도 끊임없이 아마추어식 국정운영이라는 일각의 비판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시민운동하듯이 국가를 운영한다, 아젠다는 있어도 로드맵은 없다, 리스크헷징이라는 개념이 없다, 국가공권력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회의론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신뢰만 있었다는 식이었다. 아마추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 처음 세운 계획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한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류를 수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2) 선의를 가지고 세운 아젠다 만큼이나 로드맵이 중요하고 로드맵 만큼이나 과정관리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실제 집행할 주체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인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또한 모든 정책적 효과는 처음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시장과 개별적 인간은 훨씬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해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3) 그런 만큼 국정지도자는 물론이고 정책당국자나 정치인들의 큰 덕목중에 하나가 바로 소통인 것이다. 국민과의 소통, 주변과의 소통, 정치적 상대방과의 소통, 각계 전문가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무오류의 정치나 국정운영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했음에도 문재인 정부 초기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식의 지지와 지원에 취해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다섯번째가 비전없는 정치다. 민주당 초선모임 올해 초에 "생계형 정치, '변화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정치'는 의미가 없다" "국민으로부터 주어진 다선의 시간 동안 시대의 과제를 해결해주지 못하거나 국민의 고통을 덜고 희망을 보여줄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그런 정치를 계속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한 보수원로는 “국제적 비전이 없는 정치는 값싼 민족주의에 안주하려 하고, 국내적 비전이 없는 정치는 편 가르기로 정치적 명맥을 유지하려 한다”고 통찰을 보여주었다.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비전없는 정치는 단지 586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정치가 언제부터인가 비전없는 정치로 몰락했다. 보통 비전이라 함은 최소 10년, 20년은 내다보고 대한민국의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무엇인지를 이야기해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국가적 과제, 시대적 과제들이 그러한 비전속에서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 지를 밝혀야 한다. 세대교체, 정치교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대부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고 토론하고 정책과 과제로 만들어 숙의하는 과정을 걸어가 본 적이 없다. 윤석렬 정부는 인수위원회를 거치면서 국가비전으로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로 정했다. 이 정도면 20대 대통령 선거가 비전없는 네거티브 비호감 선거라는 세평은 맞는 것 같다. 아니면 한국정치에서 소위 국가비전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을까?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정보화대국, 노무현의 균형발전론과 행정수도이전 등의 비전을 우리 진보정치권에 요구하는게 불가능한가. 철학의 빈곤이요, 비전의 실종이다. 실력이 모자라니 정치공학에 몰두한다. 어떻게 하면 인기가 올라갈지, 갈라치기를 하면 내 편이 결집할지, 누구와 단일화해야 할지, 언제 입당하는 게 유리할지…. 네거티브와 정치적 셈법, 진영논리만으로 대권을 잡으면 금세 길을 잃고, 남 탓만 하는 실패한 정권이 되기 십상이다.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586세대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반독재 투쟁 시절의 ‘586식 정의’는 시효가 끝났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586은 이제 진지한 답을 내놔야 한다. 물러날 것인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인지... “586 운동권이 그들이 젊은 시절 지녔던 보다 나은 세상을 겨냥한 변화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 순수한 '원형질'을 바탕으로 더 건강하고, 미래지향적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시대에 뒤진 <꼰대>로, 패거리 싸움과 권력영속화에만 집착한다면, 한국의 진보세력의 장래는 암울하다”는 한 식자의 지적에 겸허해야 할 때다.
3. 어디서 시작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1) 반성과 성찰이다
최소한 몇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첫번째는 촛불혁명 5년만에 진보진영이 정권을 내주었다는 결과 뿐 아니라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게 된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진영논리에 갇혀 선과악의 이분법적인 논리가 횡행하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하면서 반성적으로 살펴볼 이유가 있어 보인다. 촛불광장은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참여와 연대의 경험을 통해 깨어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장이었다.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대통령 탄핵까지 이끌어냈던 바, 행동으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효능감을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든 시민들이나 마음을 모아주었던 시민들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참여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사실과 시민들이 개별적인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한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딱 거기까지 였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가 서구 민주사회에 비해 일천한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오랜 민주주의의 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국민의 손으로 이끌어냈다. 나아가 노무현 정권은 정권 스스로 참여민주주의의 역사를 열고자 했고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하더라도 정부의 별칭을 참여정부라 하며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강조했다. 그런 노력을 기초로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은 다원성과 다양성이 특징인 시대적 변화에 맞춰 이제 연대와 사회적 숙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로 가야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한 촛불혁명이라는 큰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진보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 ‘국민이 주인인 정부’라는 국정목표 아래 첫 번째 국정전략은 ‘국민주권의 촛불민주주의 실현’을 내걸었고, ‘국민주권적 개헌 및 국민 참여 정치개혁’이라는 국정과제도 선정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시민사회 영역은 국민 정책제안의 제도화, 다양한 거버넌스의 활성화, 숙의민주주의와 민주시민교육의 정착 등이 제안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효성있게 추진되지 못했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촛불혁명의 성과를 민주당이 독식했고, 촛불혁명을 등에 업은 문재인 정부는 연대와 숙의보다는 촛불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상대방을 압도하였다. 촛불을 든 수많은 정치세력과 시민사회 그리고 당시 여당의 일부 조차 촛불혁명의 성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 결과 선의를 갖고 추진한 많은 정책들이 국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 조정과 타협보다는 일방통행인 경우가 많아졌다.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직접 민주주의의 노력이 형해화되다 보니 대의민주주의도 직접 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이는 촛불혁명이후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물론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려는 철학과 가치에 입각한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반성적으로 검토할 문제는 소위 ‘조국사태’이다. 최근엔 ‘조국사태’ 자체보다는 ‘조국사태 사과논란’으로 표현하는게 맞을 것 같다. 조국 전 법무장관을 둘러싼 사과논란은 대부분 정치적 이유에서 발생했다. 이해찬 전대표의 세줄짜리 사과, 초선의원들의 사과와 반성 요구와 이에 대한 팬덤의 반발, 20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의 사과, 송영길 전 대표의 조국사태에 대한 정치적 사과까지. 올해 들어서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당의 반성과 성찰, 사과를 요구하자 조전장관은 "저는 2019년 하반기 장관 후보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자 간담회, 인사청문회,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 과정에서도 사과를 표명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후에도 또 사과하라고 하신다면, 몇백 번이고 사과하겠다" 이런 조국 전 장관 개인의 사과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페북에 분풀이하고 또 사과하고 반복 중이다"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조전장관의 이런 태도는 법률적 문제가 아직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어권적 차원과 더불어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켜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감안해서 볼 부분이 분명 있다 할 것이다. 오히려 성찰할 부분은 문재인 전대통령과 민주당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문제라 할 것이다. 조국사태 초기 수많은 586세대 명망가들이 SNS 등을 통해 ‘친구’이자 ‘동료’인 조 전장관을 옹호했다. 청년들은 ‘거품’을 걷어낸 뒤 마주한 586세대의 민낯이 이른바 ‘보수 기득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느꼈다. 국민은 특히 청년들은 기득권 카르텔과 일반 계급이 나뉘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며 “진보는 가치를 상실했고, 86세대는 ‘이익 네트워크’로 변질했다”고 아프게 지적했다. 거대여당인 민주당은 이런 국민들의 지적에 적절한 답을 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적 사과만 반복했을 뿐. 중도층 선거전략 차원에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정치적 이벤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평가되었다. 민주당 전체적으로도 성찰의 목소리가 계속 나와야 하는데 그럴 기미는 없고, 오히려 일부 지지층의 반발을 묵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4·7 재·보선 참패 후 2030 초선 의원을 중심으로 조국 사태를 반성하자는 목소리를 냈지만 강성 지지자들의 문자 폭탄에 치여 덮어버린 적도 있다. 또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반성과 성찰이 분명치 않았다는 점이다. 조국사태 초기에는 청년층을 비롯한 다수의 국민은 적극적 소명을 여권에 요구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검찰개혁의 적임자는 조국뿐”이라는 국민적 정서와는 괴리된 대답뿐이었다. 나아가 조 전 장관이 검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인식을 보였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해도 위선과 내로남불, 공정문제에 대한 국민의 실망, 당내인사들의 온정주의적 태도 등 국민적인 실망과 분노앞에서 문재인정부 최대의 참사라는 평가를 받는 조국사태에 대한 대통령과 청와대의 대응은 너무 미온적이고 회피적이었다. 퇴임을 앞두고도 대통령은 "시점이나 수사 방식을 보면 공교로운 부분이 많아서 목적이나 의도가 포함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라며 국민적 관점에 서서 이 문제를 정리하지 못했다. 나아가 반칙과 특권을 이겨내는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의 문제, 교육에서의 기회의 균등문제 등 교육시스템의 혁신 문제, 운동권 엘리트들의 위선의 문제 등 국민이 분노하고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지점에 대한 공감과 답을 내려는 노력은 너무나 미흡했다. 그러니 여전히 조국을 둘러싼 논쟁은 진행 중이다.
다음으로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로서 문재인 정부 정책실패의 대명사처럼 평가되어 버린 부동산을 둘러싼 문제를 다양하게 되집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정책적 무능으로 평가되는 이유에 대해 분명히 해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대통령 스스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그동안 시행해 온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논의해야 할 초점은 부동산 정책 자체는 아니다. 양도세·보유세 강화와 대출규제 등 그동안의 투기근절을 위한 규제중심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는 다른 기회에서 보다 정교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문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조장한 것도 아니고 집값안정이라는 정책목표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무주택 서민이나 신혼부부, 청년들의 주택마련에 대한 꿈을 무시한 것도 아니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통해 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동산 정책을 대하는 문정부의 철학과 태도의 문제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에서는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 장하성 전 정책실장은 “모든 국민이 강남에 가서 살 이유는 없다”, 김현미 전 장관은 “30대 젊은이들의 영끌이 안타깝다”고 했다. 즉 부동산은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이고, 밤새 일해 덜입고 덜먹으며 돈 모아도 대출당겨 집산사람보다 못살게되는 공정과 형평의 문제였으나 문정부의 태도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동산 문제는 투기 때문이다. 일부 다주택자가 물을 흐리고 있다. 갭투자도 문제다. 부동산으로 돈버는 돈줄을 막아야 한다. 다주택자들 세금을 강화해 팔게 하자. 공공부문이 주택 공급에 적극 나서도록 하자. 분양가가 높아지는 것도 막아야 한다. 임차인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2년마다 전세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 싶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문정부는 선의와 규제의 힘을 믿었으나 서울집값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패신화 앞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한 엄청난 시장의 욕망과 유동성, 자고나면 1억원이 올랐다는 식의 부추김속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그리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평범한 욕망은 문정부의 생각을 넘어섰다. 시장의 교활함과 인간의 욕망을 상대하기에 문정부는 너무 안이했다. 둘째, 부동산 관련한 문정부에 대한 국민적 배신감에 대한 태도 문제다. 대통령은 LH 등 공공기관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가 국민들 마음에 큰 상처를 줬다며 부동산 투기 차단을 위한 개혁은 완결짓겠다고 했으나 점검기관 만든 것 빼고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불로소득을 놓지 않으려는 행위가 정권 수뇌부에서 지속되었다. 다주택자인 청와대 고위공직자들이 기본적 윤리의식은 커녕 자신부터 정책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셋째, 하다못해 부동산 불로소득을 차단하는 것이 집값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이라도 있었다면 그 길이 오래가야 할 정치적으론 가시밭길이라는 각오라도 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집을 사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뿐, 뒷전에선 중산층 유권자 불만을 달래기에 바빴다. 집값은 쉽게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여당 의원이나 선거를 앞두고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거론하는 민주당 지도부가 있었다. 넷째는 실책이다. 한마디로 당장 내집마련이 급하지 않은 예비수요자들에게 위기의 시그널을 줘서 실수요자로 바꿔버린 것이다. 규제를 하나씩 계속 더해갈수록 다음엔 규제가 더 늘 수도 있다는 신호를 줘 오히려 예비수요자의 불안감을 자극한 것이다. 다섯째는 부동산 문제를 선악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당시 영끌이라고 하듯 사적욕망일지라도 당시 필요한 일은 국민에게 “집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고 우리도 최대한 공급을 할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야 했다. 또한 설사 불로소득 배제에 대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첫걸음은 집가진 사람들을 죄악시 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설득하고 정책적으로 유인을 해서 매도를 유도했어야 했다. 즉 개별적 사람들 사이의 욕망의 충돌을 중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다음으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20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 전개된 민주당의 정치적 행태이다. 그 첫째는 대통령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 관련이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선거결과에 대한 평가와 관련 당 전체가 공유하고 공감한 평가를 진행하지 못했다. 초선의원들, 몇몇의 의원모임에서 각자 진행한 반성과 성찰을 위한 평가토론회가 진행되었지만 당차원에서 진행한 의미있는 반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졌잘싸 프레임으로 이재명대표 진영은 정치적으로 후퇴해야 할 국면을 돌파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20대 대선처럼 나라 전체가 반으로 갈라져 비호감 대선이라 일컬어질 만큼 네거티브로 점철된 선거에서 어느 한 진영에 포섭되어있을 경우, 특히 0.73%라는 득표율의 차이로 석패했을 때 상대에 대한 분노와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앞서지 자신을 포함한 자기가 속한 진영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추진하기란 녹녹치 않다. ‘졌잘싸 프레임에 갇히면 답이 없다’ ‘무난한 반성으로는 지방선거도 무난히 패배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되었다. 당연히 지방선거도 완패. 윤호중·우상호 비대위는 선거결과 평가에 따른 당 개혁과 혁신에 대한 어떤 아젠다도 만들지 못했다. 촛불혁명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안고 출범한 문재인정부,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와 총선의 압승, 코로나19 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전 국민에게 지출된 예산 등 소위 10년 집권사이클을 만들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했음에도 대선에서 패배한 구체적인 평가는 뒤로하더라도 최소한 답을 얻어야 할 대목을 짚어봐야 한다. 1) 다수 평론가들은 ‘조국사태 등 기득권 내로남불’, ‘단체장 성추행사건’ ‘부동산 정책실패’를 패배원인으로 꼽는데 정말 그런가? 오히려 그런 사건이후 문재인대통령 이하 집권여당의 대응과 태도가 문제 아닌가? 2) 역대 최약체로 평가되는 상대후보에 비해 압도적인 후보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후보선택의 문제는 없는가? 3) 민주당정권과 민주당후보가 상대에 비해 더 이상 도덕적이지도 않고, 위선적인 기득권세력처럼 보이는 것은 같고, 거기다 무능하다는 프레임까지 덧씌워졌다. 그 결과 4.7재보선은 그 위기를 현실로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노력이 부재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4) 일부 평자들은 ‘민주당의 위기는 시대정신과 가치부재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불공정·불평등·저출산·기후위기 등 시대적 과제와 이를 극복할 가치로서의 시대정신 등과 관련하여 민주당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사태에 대해 답을 내야 한다.
둘째는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현 대표의 거의 일방적이다 시피한 정치적 독주에 대해 민주당 누구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현 상황에 대한 분명한 진단이 있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 출마와 당대표 경선출마 등과 관련하여 민주당내에는 계파를 불문하고 최소한 무리한 정치행보라는 공감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自生黨死’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이재명대표 개인 입장에서는 제기되고 있는 각종 사법리스크 속에서 정치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환경조성이라는 관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그런 선택이 다음 총선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등 민주당의 향후 정치적 입지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폭넓은 우려도 낳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셀프공천’이라는 공당에서는 있어서는 보기 힘든 장면까지 연출되었다. 이재명 대표 본인이 세운 비대위원장에게 자신의 공천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민주당의 민주적 공천시스템의 중단이라는 사정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반성도 없었다. 오직 이재명 대표 본인 입으로 ‘당원들의 요구에 따랐다’는 말뿐이었다. 민주당의 공천시스템의 문제는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서도 나타났다. 각 시도당별로 이루어진 지방선거 공천에서 그동안 민주당이 자랑하던 시스템 공천의 민낯이 드러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로는 시스템 공천이었으나 실제 지방선거 공천의 가장 큰 기준이 해당 지역위원장의 의견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결과 많은 곳에서 단수공천이 횡행했고 공천이 배제된 많은 출마희망자들은 배제 사유조차 들을 수 없었다.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독주는 전당대회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예상되는 이재명 대표체제를 뒷받침하려는 노력이 추진되었다. 하나가 ‘당원중심 정당’이다. 개딸로 대표되는 적극지지층의 지원을 받는 이재명 대표는 향후 당운영에서도 이를 정치적 큰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해 ‘전당원투표’를 당 공천규정까지 확정할 수 있는 최상위의 당 의사결정단위로 만들려했으나 당 중앙위투표에서 부결되었다. 다른 하나는 사법적인 문제로 민주당 당직자가 기소될 경우 당직을 내려놓게 규정한 소위 ‘당헌80조’ 문제이다. 이재명대표측은 이를 검찰공화국이라는 현 상황에서 검찰의 정치적 침탈에 당을 취약하게 만들 것이라며 개정을 시도했고 논란 끝에 윤리위원회를 통한 ‘사후 구제 조항’이를 당헌 80조의 성격을 ‘사전 정무판단 조항’으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은 내용 자체에 대한 검토는 차치하더라도 당 강령과 당헌을 개정하는 일에 제대로 된 민주당내 논의와 숙의과정이 없었다는 것이고 이를 당연시 했다는 점이다. 당내 민주화의 가장 기초라 할 수 있는 절차상의 문제가 이렇게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다음으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대목은 ‘팬덤정치’이다. 지금의 정치팬덤은 그안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사진, 짤방(이미지), 영상이 공유되고 팬이 직접 참여해서 만드는 각종 소비자 생산 콘텐트가 공유되며 지지세를 키워간다. 팬덤은 자발적으로 상대 팬덤과 싸우며 지지하는 정치인을 홍보하고 상대 정치인의 약점을 공격하며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성하려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지 정치인이 승리하는 모습과 상대방 정치인이 패배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팬 스스로가 참여하는 일이었다. 팬덤정치는 참여하는 팬의 정체성처럼 이해되었고 자기확인과 자기확신이라는 효용을 안겨주었다. 이런 팬덤정치는 진영논리가 전체 사회를 딱 반쪽으로 쪼개놓은 환경아래 이를 부추기는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가 횡행하는 속에서 확증편향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해!’라는 인식속에서 정치인과 국민 사이의 성숙하고 건강한 긴장관계는 불가능하다. 강준만교수 말 맞다나 “사실 침묵하는 대다수는 여론조사나 선거 때 자신의 선택을 밝히는 걸 말고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길이 없다. 정당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전체의 1%도 안되는 팬덤이나 열성 지지자들이다. 이는 기존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로 보는게 옳다”는 인식은 일면 타당하다. 정치팬덤 내에서의 확증편향이 형성되는 과정은 SNS와 각종 커뮤니티에서 자기 팬덤에게 유리한 사실과 논리만을 생산하고 유포함으로써 시작된다. 팬덤에게 유리하다면 가짜뉴스나 사실에 기반하지 못한 억지논리도 차용한다. 유시민씨는 2021년 1월 ‘검찰의 노무현재단 사찰’주장과 관련하여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다.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다”며 정치비평을 그만하겠다고 한 바도 있다. 최승호 뉴스타파 PD는 “인플루언서들은 때로는 감탄할 정도로 창의적인 논리를 제시하지만 시간이 지나 검토해보면 틀린 주장으로 확인될 때가 많다”“현실을 직접 취재해서 말하는 경우가 드물고 민주당을 감싸야 한다는 의도에서 다른 언론들이 취재해놓은 사실을 취사선택해 가공하기 때문에 오류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이 반복해서 쌓이면 지지자들을 왜곡된 현실인식을 갖게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팬덤을 형성하는 것은 대부분 강성지지층이다. 문제는 일부 이런 강성팬덤만 바라보고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정치인들에게 있다. 민주당에서는 당내에서 정치적 체급을 키우는 공식이 있다. 힘껏 조국수호에 앞장서고, 검찰 언론 개혁의 목청을 돋우고 우리 진영의 잘못도 적극 감싸는데 앞장서는 등 내로남불에 힘쓰면 일부 강성지지자들의 성원을 등에 업을 수 있고 이렇게 공천도 받고 최고위원도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성공하면 과대대표된 강성지지자들의 주장을 다시 대변하고 그렇게 중도와 민심과 멀어져 간다. 어떤 교수는 “민주당 초재선 정치인들은 강성팬덤만 바라보고 있는거 같다. 강성팬덤들의 당에 대한 공헌이 있다. 그러나 이들만 바라보는 의제설정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중도진보정당으로서는 치명적이다. 대표적인 것은 과거기억에 대한 왜곡이다. 강성팬덤들은 2020년 총선 180석 압승을 검찰, 언론개혁 완수를 바라는 촛불의지라 해석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도 강성팬덤은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개딸로 대표되는 친명팬덤은 전당대회 출마자들 가운데 함께 하지 않아야 할 배제명단을 공공연히 게재했고 각종 친명 커뮤니티나 SNS상에 노출시켰고 급기야는 친이재명표의 쏠림에 따른 또 다른 친명후보의 탈락을 우려해 ‘생년월일’에 따라 투표해야 할 대상을 정하기 까지 했다. 이런 강성팬덤과 지지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전당대회 권리당원 투표율을 37%로 마무리되었다. 다수 권리당원들의 외면과 국민적 무관심은 새로 출발한 민주당의 큰 숙제로 남게 되었다.
2) 민주당이 진보진영의 중심으로 다시 서기 위한 몇가지 과제에 대해서
첫째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통합적인 리더십을 구축해야 한다. 그동안 민주당은 국회의석 170석에 가까운 거대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엔진도 방향타도 망가진 항공모함같은 느낌이었다. 그 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리더십은 이재명 전 대통령후보인데, 인천 계양구 보궐선거 당선과 이번 8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음으로써 형식적인 민주당의 원톱 리더십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대표의 리더십은 끊임없는 사법적 리스크로 인해 윤석렬 정권과 강대강의 대척점 구축을 기본으로 한 적대적 공생의 관계를 극복하기 어려워보인다. 민주당 내부적으로도 깨딸로 대표되는 강성팬덤에 기반한 리더십이기에 민주적이고 통합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특히 전당대회 과정에서 줄서기와 줄세우기로 일관한 친이재명계 최고위원들과 그 정점의 이재명 대표에게 미래지향적인 리더십, 민주당 쇄신의 리더십, 나아가 진보진영 전체의 재구성을 위한 리더십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 하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당내 주류의 한축을 이루고 있던 소위 586정치인들에게 상응하는 보완적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586정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기비판의 치열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586정치에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리더십 발휘를 희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송영길 전대표 이후 윤호중·우상호 비대위원장에 이르기까지 형식적 리더십을 확보했던 586들은 대통령선거 패배와 지방선거 완패라는 당의 위기상황에서 어떤 혁신적 리더십도 보여주지 못했다. 상징적 리더십으로서 문 전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 스스로 ‘잊혀진 삶’을 살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고, 문 전대통령의 상징적 리더십을 차용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을 수 있으나 그나마도 회고적이고 방어적인 리더십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민주당의 리더십 부재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 자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예견되었기에 8월 전당대회는 형식적인 원톱리더십이 아니라 집단적 리더십을 구축하는 과정이기를 희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적 지도체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민주당은 그 구성상 이념적 스펙트럼도 넓고, 형식은 달라도 정치적 정서적 공감대를 기초로 한 다양한 정치그룹이 존재한다. 170여석에 가까운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포괄하고 나아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다양한 계기에 민주당과 함께 하고 있는 당원과 지지자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도 집단적 지도체제 도입이 필요했었다. 이를 기초로 당내 다양한 의견들이 토론과 숙의과정을 거치게 되고 당내 정치가 활발해짐으로써 최소한 독주와 독선, 독식이라는 일방통행식 리더십을 극복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재명대표와 친이재명계 일색의 최고위원회 구성을 보면서 전당대회 권리당원 투표율 37%가 갖는 함의와 과제가 더 크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이재명 당대표체제라는 형식적 원톱리더십에도 불구하고 당내 다양한 정치적 의견그룹 활동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토론과 숙의가 제거된 원팀 원보이스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170석이라는 거대야당 내부에서부터 역동성을 만들어냄으로써 국민의 시선을 뺏어오지 못한다면 민주당의 정치적 미래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그 시작으로서 민주당 의원총회가 명실상부한 토론과 숙의의 장이 되고, 민주당내 다양한 정치적 의견그룹들의 활발할 활동을 기대해 본다. 이재명 당대표 체제는 이런 활발한 당내정치를 거치면서 민주적 리더십, 통합적 리더십을 재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과제로 민주당을 넘어서는 새로운 진보개혁 정치운동이 필요하다. 왜 정치운동인가? 새로운 진보의 모습에 대한 진보진영 전체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정치운동은 국민을 대상화하는 과거 방식의 정치운동이 아니라 진보진영 스스로를 각성케 하고 자성케 하는 정치운동이 필요하다. 지금은 윤석렬 정권을 탄생시킨 국민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과 시대적 과제에 불철저하고 이를 위한 전략방안 마련에도 소홀히 한 민주당은 물론 진보진영 전체가 문제라 보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문제는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연패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 전체에서 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이를 기반으로 민주당에도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학계나 시민사회의 견해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이래야 하는데 그럴만한 움직임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당도 그리고 진보진영도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그 목표가 세대교체든 시대교체든 정치교체든 진보진영 재구성과 진보개혁의 새로운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시작하는 진보개혁 진영구축을 위한 정치운동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그 시작은 ‘포용과 연대의 정신을 기반으로 불공정·불평등 극복을 위한 진보블럭’ 같은 네트워크를 먼저 구성하는 것이 어떤가 한다. 시민사회, 학계, 종교계, 노동계, 전문가집단 그리고 제도정치권을 포괄하는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대정신과 가치를 결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추진할 수 있는 진보재구성과 권력창출을 위한 전략적 관점에서 시대적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그 아래 각 부문과 참여자별로 역할을 나누고 상호 지원하는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문재인정부를 거치면서 논란은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진보개혁진영의 인적·물적 지평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력 만들기가 만만치 않다. 그 가장 큰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민주당을 포함하여 진보개혁 진영 곳곳이 이미 작은 기득권이 되어 이를 지키는데 급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시작은 작은 기득권에 안주하는게 아니라 진부한 이야기지만 열가지 가운데 아홉이 다르고 하나만 같다하더라도 함께 하려는 ‘포용’과 ‘연대’의 정신이 필요하다. 和而不同, 求同存異가 다원화된 시대에 진보진영 연대의 가치여야 한다. 그런 진보개혁진영내 상호 포용과 정치사회적 연대의 문화를 만드는데 민주당이 가장 앞장서야 한다. 진보진영 재구성을 위한 정치운동은 이제 다양한 이론적 토대와 사상적 배경을 바탕으로 모색되어져야 한다. 이를 기초로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설득력 있는 대안 제시와 다양한 퍼포먼스 등 정치적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운동이 가치와 비전을 갖춘 대안세력이 커나갈 수 있는 토양이 될 것이다. 선거의 승리는 그런 운동이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새로운 정치운동이 성과가 있기 위해선 이상주의와 실용주의의 사이, 제도권 안과 제도권 밖에서 일하는 것 사이, 대담한 비전과 정치적 타협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긴장을 견뎌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는 숙의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 두가지 철학적 지향이 우리 생활정치에 어떻게 뿌릴 내릴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고민까지 필요하다. 야당이 집권하는 실질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어냄으로써 김대중 전대통령은 절차적 민주주의 큰 틀을 보여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무현정부의 별칭을 참여정부라 쓸 만큼 참여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 이후 어떤 민주주의의 전망이나 성숙도 보여주지 못했다. 소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선악 이분법과 진영논리, 확증편향, 팬덤정치에 매몰되면서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여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평자는 비슷한 진단아래 집단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동맹을 추구하는 ‘정체성 정치’ 때문에 한국 정치가 비토크라시의 늪에 빠졌다고 개탄하며 정체성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본령인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까지 지적했다. 개인적으로는 진단에는 동의하나 결론은 그렇지 않다. 정치는 분명 정체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가치와 철학과 비전을 매개로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다만 그러한 사회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정체성들이 상호 경쟁하며 협력하는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의 여부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숙의민주주의’ 이고 ‘공화주의’이다. 이런 생산적인 긴장관계를 만들어내는데 앞서 언급한 선악 이분법, 진영논리, 확증편향, 팬덤정치는 도움되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상호존중과 관용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규범아래 숙의민주주의는 단순한 투표, 여론조사 혹은 단순 다수의사를 따라가는 수준을 넘어 자유롭고 평등하며 열린 토론을 바탕으로 참여의 질을 높이는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나갈 수 있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지만 숙의민주주의는 대부분 사회적 갈등 특히 공공갈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갈등 해결과정에 시민들이보다 적극적인 주체로서 참여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출발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숙의과정이 전국 단위건 지역단위건 다양한 공론장 뿐만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공론장이라 할 수 있는 의회, 그리고 그 한 주체라 할 수 있는 정당내에서도 적극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은 대의민주주의의 축소와 더 많은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을 대표하는 자들이 충분히 심의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참여민주주의가 요청된다고 하여 더 많은 참여가 더 나은 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시민들에게 성숙한 공적 숙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고, 그것을 통해 참여가 유도되도록 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더 나은 민주주의로 우리 사회를 이끌 것이다. 즉, 숙의와 참여가 함께 할 때 더 나은 민주주의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라는 연구자들의 충고는 깊이 새길만 하다. 물론 숙의민주주의 자체의 한계도 있다. 지배적 정치권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제라든지, 숙의민주주의가 정치권력이나 자본의 힘에 상당부분 눈감고 있다던지, 일상중심의 실용정치에 사람들의 의식을 집중시킨다든지, 숙의과정을 거친 결론에 대한 정치적 책임 문제 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하고 있는 우리 정치권, 나아가 반쪽으로 갈라진 나라 상황을 살펴보면 숙의민주주의의 활성화는 분명 우리 민주주의를 한단계 앞으로 전진시킬 만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검토해야 하는 문제는 ‘공화주의’이다. 그동안 대의민주주의내 엘리트주의적 경향에 대한 대안으로 참여민주주의의 확장이 있었다. SNS의 발전과 촛불혁명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이를 더욱 크게 하였다. 그러나 일방적 참여민주주의의 확장이 무원칙한 대중추수주의로서의 포퓰리즘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도 국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처럼 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상태에 있고 극단적으로 양분된 사회에서는 무너진 공동선을 세우고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의 가치와 이익을 발견하고 모색하는 시도를 해야하는 바, 그런 관점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검토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성장시켜나가는데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공화주의는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한 갈등 관계 또는 긴장 관계에 있는 사회 세력 사이에 '균형 갖춘 정치 체제'를 지향한다. 이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누구도 지배당하거나 예속 관계에 처하지 않아야 한다는 공화주의 정신의 필연적 귀결이다.”“또한 힘의 불균형은 결국 부정부패를 낳게 된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며, 사회의 다양한 세력 간에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평등하게 발언할 기회가 보장되지 않을 때 극단적 갈등과 상대에 대한 증오와 혐오로 치닫게 된다는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는 연구자들의 통찰에 귀기울여야 할 때다. 즉 공화주의 정신은 이해관계 충돌 지점이 어디인지, 이들이 누구인지, 상대적으로 약자가 충분히 발언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이 법과 제도로 보장되어 있는지, 혹시 그 불균형으로 갈등이 증폭되는 곳이 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는지 등을 돌아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공화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 각분야의 엘리트와 일반 시민, 부동산 업자와 집 없는 서민, 의사와 환자, 남성과 여성, 직업 정치인과 일반 시민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법과 제도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
넷째는 국민통합과 사회통합에 대한 자기 비전과 계획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분열과 갈등이 극도록 심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동안 통합의 아젠다는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여당의 몫인양 해왔다. 정치적으로 양진영이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나면 대다수의 언론과 학자연 하는 분들은 양측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을 개탄하고 새롭게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통합’을 요구한다. 매 대선마다 끝나면 반복해온 일이기도 하다. 비록 윤석열 인수위가 ‘국민통합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통령실에 국민통합비서관을 임명하고, 새로 임명된 총리가 첫일성으로 통합과 협치를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매번 그랬듯이 통합이 정치적 레토릭으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럴려면 통합에 대한 치밀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책임에서 집권여당의 책임이 더 크다 하더라도 정치적 거대양당 가운데 하나인 야당 역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 인종, 종교, 언어 등의 근본적인 균열이 존재하지 않는 동질성이 매우 높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나라 전체가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할 만큼 분열과 갈등의 골이 높은 사회다. 개인적으로는 그 큰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양당은 정략적으로 상대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선악 이분법과 진영논리로 정치영역 뿐 아니라 지역, 젠더, 세대, 집값, 안보, 노사, 시민사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양극단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겼다. 이렇게 조각나버린 사회지형에서 통합은 간단하지 않다. 대통령이 지역을 배려하고 여성을 배려하고 세대를 배려한 인사 몇 번을 잘한다고 해서 통합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정치권에서 여야가 ‘협치’라는 이름으로 대화와 타협의 의회를 이끌어 간다해서 분열과 갈등이 치유될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물론 그 의미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분열과 갈등의 골이 너무 넓고 깊다. 그런 의미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2021년 2월 국회의장 직속 국회국민통합위원회(위원장 임채정, 김형오)가 정치,경제,사회 분과 활동을 거쳐 11월 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간한 ‘국민통합위한 제언’이라는 두권의 책자를 주목할 만하다.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국민통합을 위한 나름 체계적인 논의와 토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언은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의회·선거·정당 제도 및 권력구조이 개편이 필요함을 정리했고, 경제적으로는 자산양극화·노동양극화 완화와 사회안전망 강화를 통한 경제불평등 해소 그리고 공정경제를 통해 국민경제 각 부문의 균형적 성장 도모 등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기구를 국회에 신설하자는 제안, 사회분과에선 세대·계층·일자리·젠더 갈등 해소, 디지털격차 해소, 사회적 고립 및 배제 해소, 혁신관련 갈등 해소 등과 함께 미디어공론장 기능회복 등 사회갈등 조정 기재 재정립과 그 핵심으로 노동-복지-혁신의 복합해법 모색 등이 제안했다. 문제는 이런 결과물들을 정치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성과들을 기초로 ‘국민통합을 위한 공론화’ 과정을 여야가 함께 추진하고 그 결과물을 여야간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강제하는 일련의 정치력이 필요한 시점이라 할 것이다. 이런 통합의 실질적인 진전을 위해선 몇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1)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 즉 아무리 소수의 의견이라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단순 다수의 원칙을 넘어서지 않으면 통합은 이름뿐이고 다수의 폭력이 되기 십상이다. 2) 과정 자체를 중요시 해야 한다. 특히 공론화 과정은 필수라 할 것이다. 통합은 한 두가지 훌륭한 정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통합을 위한 공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통합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충분한 논의를 위한 자료와 연구결과 그리고 주의주장들을 공개된 가운데 함께 검토하고 논증해가는 과정에 이해집단을 비롯한 다수 국민들이 함께 귀기울이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렇게 통합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게 아니라 국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3) 통합 추진은 입체적이어야 한다. 우선 단기·중기·장기 과제들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단계적 추진에 대한 방안도 열어놓아야 하며, 시범실시 이후 평가를 거쳐 진행할 수도 있고, 개별 통합 과제들 가운데 연동되어 있는 것들은 함께 검토하는 등 입체적 접근이 필수라 할 것이다. 4) 설득과 타협에 기초한 합의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합의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나 피해서는 안된다. 우리 정치권은 지금까지 승자독식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승자독식은 패자의 대표성이 전면 부정된다는 측면에서 보완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통합에 있어서 만큼은 합의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5)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통합과제들을 토론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양극단의 주장이 난무할 수 있고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 따라서 합의를 이끌어내기 용이한 것부터 해결하면서 통합의 효능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 마지막으로 유능한 진보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21대 대선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이재명의 모토는 ‘한다면 한다 - 디테일에 강한 유능한 진보’였다. 그가 성남시장시절이나 경기도지사 시절 보여준 행보가 진짜 유능한 진보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뒤로하겠다. 모토가 ‘유능한 진보’를 내세워야할 만큼 진보는 유능함과는 거리가 먼 집단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에 착목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도 2012년 대선이 끝나고 2014년 소위 싸가지 없는 진보가 아닌 유능한 진보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도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당내 경선주자중 한명이었던 손학규도 ‘저녁있는 삶’을 주장하며 민생을 직접 챙겨본 경험있는 ‘유능한 진보’를 자처한 적도 있고 가깝게는 이재명과 함께 경선했던 박용진 역시 ‘유능한 진보대통령’을 표방하며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 유능한 진보의 길을 열겠다”고 한 바도 있고 함께 대선 경선후보로 나섰던 이광재 역시 유능한 진보를 표방하고 나선 바 있다. 그 근저에 진보개혁진영은 무능하다 혹은 진보는 유능함을 증명하지 못했다라는 국민의 평가 때문이다. 김대중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까지만 해도 최소한 무능하다라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노무현정부와 문재인정부에 이르기까지 무능하다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이제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개혁진영은 유능함으로 무장해야 한다. 유능함을 전문성으로 오인하지 않길 바란다. 유능한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야 한다. 다수 국민이 민주당의 정치에 효능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부의 주장처럼 “국민은 민주당을 안보에 불안하고 먹고사는 문제에 실력이 없고 퍼주기하는 포퓰리즘에 앞장서는 무능한 진보가 아니냐”고 비판하며, “튼튼한 안보, 먹고사는 문제에 실력있는 경제 능력, 지속가능한 복지제도”가 유능한 진보라고 하지만 이는 유능한 진보의 예상가능한 성과에 불과하지 ‘유능한 진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유능한 진보를 국민앞에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몇가지를 정리하려 한다. 1) 진보의 정체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을 지나면서 국민의 힘과의 차별성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평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공약만 놓고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책 아이디어에서 달라도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이유가 되었던 부동산 문제를 예를 들자면 ‘재건축 재개발 활성화’와 ‘부동산 관련 규제 완화’에서 큰 차이가 없다. 왜 민주당이어야 하는지, 왜 진보개혁진영에게 국민이 투표해야 하는지를 최소한 철학과 가치에 기반한 정책에 있어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다못해 지방선거인데 서울의 경우 강남북 격차 완화 대책이나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에 대한 비전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2) 진보도 변해야 산다. 도덕적 우월감과 당위론에 집착하는 진보를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보개혁진영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라는 것이 환상임을 이미 국민이 알아차렸다. “상대의 문제에 집착하면 도덕적 우월감은 충족되지만 나의 문제는 가려진다. 그래서 도덕적 우월감은 현실에서의 무능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라는 지적이 뼈아프다. 진보진영은 선하고 상대진영은 악하다라고, 진보는 선의의 행동주체이고 왜곡된 현실이 변화의 대상이라고 해도 자기위안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또한 진보개혁진영은 그 완고함으로 현실 변화에 둔감하고 당위론에 치우쳐 있었다. 선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성숙한 민주시민이더라도 이해관계에서는 이기적인 인간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넘치는 자기 확신으로 대중을 가르치려 들지만,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노력은 부족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내부에서의 비판은 온정주의에 파묻혀 배척되거나 정치적으로 상대에게 이용될 수 있다고 봉쇄하려 한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면서 자신은 변하지 않는 이 모순을 극복하지 않는 이상 진보의 미래는 없다. 3) 실용적이고 유연한 진보로 발전해야 한다. 그런 진보개혁 정책에 국민이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 실용적인 진보와 관련해서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태도를 참고할 만 하다. 김 전대통령은 실사구시의 태도 견지해야 변화하는 세계에 진보개혁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망원경처럼 멀리도 봐야 하고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살피기도 해야 한다라던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필요하다라는 그의 금언은 여전히 진보개혁진영 입장에서 새겨들을 만 하다라고 본다. 대중들은 현재의 삶이 너무 곤궁하면 생존본능에 부응하는 감각적인 처방에 귀기울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진보개혁은 너무 점잖고 도도해서 제대로 코드를 못맞추고 보수는 사람의 속물적 속성을 알고 이에 잘 반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는 지적을 들어야 한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철학과 가치를 내팽개친 대중추수주의 즉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한다. 김 전대통령은 이와 관련하여 정치인은 국민 보다 반보 앞서야 한다라고 통찰을 보여준 바 있다. 이 반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한보나 두보를 앞설 경우 국민의 손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고 국민에게 뒤쳐질 경우엔 정치인으로서 이미 소명을 다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해석한다. 4) 진보개혁진영은 정치적 권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소외계층이나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자신들과 연대하려는 진보개혁의 정치적 힘으로 경제적 지배계급을 압박해서 자신들의 계층적 이익을 획득하려는 입장을 갖는다. 그래서 이들은 진보개혁이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과 권위를 갖추기를 바란다. 정치적 기득권 포기 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훼손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이는 반정치일 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시금 도덕적 권위를 세우고 정치적 기득권이 개인의 사적 이익에 복무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에 대한 내부의 자정기제가 항상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코노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