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인도 없고, 인화도 없고

2001-01-03     이원재 연구기자
경영간섭·투자약속 놓고 데이콤 노조·LG측 이전투구…타결 실마리 ‘캄캄’
LG가 ‘청운의 꿈’을 안고 인수했던 데이콤이 추락의 길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1월8월 단체협상안 개악을 반대한다며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한 데 이어 12월7일에는 회사 쪽이 직장폐쇄를 선언하고 출근을 막기 시작했다.
이런 판에 97년 이후 처음으로 순이익이 적자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부채비율은 99년 말 82%에서 2000년 상반기 결산 때 139%, 연말에는 170%까지 치솟았고, 단기유동부채는 8천억원대를 넘어선다.


데이콤은 1년 전만 해도 ‘국내 최고의 인터넷기업’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쾌속질주했다.
증권가에서는 “한국의 아메리카온라인(AOL)”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주가는 99년 10월 초 10만원대에서 99년 말 6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LG가 데이콤을 계열사로 공식 편입한 지난해 1월 이후 데이콤 주가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LG는 이동통신의 LG텔레콤에다 유선통신사업자인 데이콤을 끼고도 IMT-2000 사업권을 얻는 데 실패하고 위성방송사업권 입찰에서마저 떨어졌다.
데이콤 노조는 LG를 향해 주는 것 없이 간섭만 한다며 파업 중이고, LG는 인수해놓고 보니 골치 아픈 부실덩어리였다며 입술을 비죽거린다.
데이콤 주가는 지난해 말 3만원까지 곤두박질쳤다 “부실덩어리다, 아니다” 책임 전가에만 급급 무엇이 얼마나 잘못됐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신영증권 박세용 연구원은 데이콤에 몰렸던 기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데이콤은 원래 종합정보통신 사업자다.
‘한국의 AOL’이라고까지 불리면서 기대를 모은 것은 기존 유선통신에다 초고속인터넷, 멀티미디어 콘텐츠까지 포괄하는 미래형 종합정보 통신사업자로 성장해 나가리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 데이콤 본체가 AOL처럼 사업을 확장시켜 가리라는 예측이 우세했던 것이다.
그런데 LG가 새 주인으로 나서면서 얘기가 달라진다.
LG는 데이콤을 LG텔레콤 및 인수를 추진하던 하나로통신을 묶는 종합통신그룹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업체로만 여긴 듯했다.
LG그룹의 정보통신사업 부문에서 일개 부품화되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연히 데이콤의 성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고, 여기서 시장의 기대도 무너지게 됐다는 얘기다.
실제로 데이콤은 올해 초 가정용 초고속인터넷서비스인 ‘보라홈넷’사업을 시작했다가 최근 이 사업을 하나로통신에 매각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AOL이 타임워너를 인수하면서 타임워너 자회사인 초고속인터넷서비스업체 ‘로드런너’를 함께 가져와 초고속인터넷사업에 뛰어든 것과는 반대방향이다.
부실화한 LG의 인터넷서비스인 채널아이를 합병하면서 부실을 떠안게 되기도 했다.
데이콤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부품화 전략이 IMT-2000사업권 획득 실패에까지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정보통신부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데이콤의 유선사업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해 낮은 평가점수를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LG쪽 입장은 다르다.
인수하고 보니 데이콤의 사업부문 가운데 사실 경쟁력이 있는 것은 콘텐츠사업뿐이고, 나머지는 만년 2위에 머물다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외전화사업부문 매각 등 당연히 해야 할 구조조정은 데이콤의 ‘강력한 노조’에 밀려 진척이 불투명하다.
남영우 부사장 등 LG에서 파견한 임원들은 초기에 직원들에게 밀려 출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미적거리는 사이 도약의 시기를 놓치고 있는 원인은 오히려 대주주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인사권과 경영권까지 간섭하려 드는 노조쪽에 있다는 장이다.
데이콤 경영진도 맞장구를 친다.
데이콤 노순석 상무는 “LG가 공식적으로 인수하기 전에도 노동조합의 지나친 경영간섭은 데이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라고 말한다.
인센티브 제도 도입, 사업부문조정 등 구조조정을 꾀할 때마다 노조가 발목을 잡아 기회를 놓쳤다는 얘기다.
“LG가 유상증자만 해줬더라면…” 하지만 문제의 더 큰 원인은 LG가 인수할 때 약속과 달리 투자를 아낀 데 있다고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해 초 유상증자를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최고 14조원까지 갔던 데이콤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3월 말까지만 해도 7조원을 웃돌았다.
20%만 유상증자를 했어도 1조4천여억원의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투자한 5천억원과 올해 투자계획으로 잡아놓은 5500억원을 모두 마련하고도 남는 금액이다.
같은 시기에 하나로통신, 드림라인, 한솔엠닷컴 등 다른 통신사업자들은 증자로 자금을 조달했다.
하지만 데이콤은 99년 초 사업계획에 있던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 계획을 지난해 3월께 ‘나스닥 상장을 통한 자금조달’로 슬그머니 바꿨다.
업계에서는 유상증자 대금의 절반 이상을 부담해야 하는 대주주 LG의 반대로 이렇게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주식시장이 고꾸라지면서 자금조달 계획 자체가 올해로 미뤄졌고, 차입으로 부족분을 메우면서 부채비율만 점점 높아지는 지경에 빠졌다.
통신사업자가 성장성을 의심받기 시작하면 기업 존립에 위협적인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LG가 초기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기간통신 사업의 특성을 전혀 몰랐던 것 같다”며 “현금흐름이 계속 발생하는 한국통신이나 SK텔레콤과는 달리 초기 자금조달이 잘 안되면 투자가 줄어들고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데이콤의 한 전직 임원은 이렇게 충고한다.
“데이콤의 부실사업 분야를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LG 쪽 입장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데이콤이 재벌총수에게 좌지우지돼서는 안 되는 독립기업이라는 직원들의 정서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재벌그룹 계열사라도 독립경영체제를 확립해 독자적으로 성장모형을 찾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 주인으로의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면서(경영권) 주인의 책임도 다하지 않는(투자) LG가 도대체 어떤 마스터플랜을 갖고 그토록 힘들여 데이콤을 인수했는지 시장은 매우 궁금해하고 있다.
‘디지털 LG’엔 2등만 와글와글?
99년 5월 LG가 데이콤 인수를 공식화했을 때, 다른 재벌들은 부러움에 찬 시선을 보냈다.
기간망과 콘텐츠의 데이콤, 인수를 추진하던 초고속인터넷의 하나로통신, 이동통신의 LG텔레콤에다 디지털가전·통신장비의 LG전자·LG정보통신까지 갖춰 ‘드림팀’을 구성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LG는 종합정보통신그룹의 필수사업으로 여겨지는 IMT-2000과 위성방송 사업권을 모두 놓쳤다.
구체적 심사결과에 대해서야 시시비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LG의 정보통신기업들이 어느 분야에서도 1등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이 결정적이라는 지적이 유력하다.
IMT-2000 사업권 입찰에 나선 한국통신, SK, LG 세그룹의 구성을 살펴보면 각각 특징이 드러난다.
한국통신은 유선전화망과 가입자 부문에서 분명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통신 본사가 정보통신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SK텔레콤은 이동전화 분야에서 거의 시장지배적 위치에 올라서 있다.
하지만 LG의 IMT-2000 사업 중심축인 LG텔레콤은 이동전화 분야에서 SK텔레콤과 한통프리텔에 밀리는 꼴찌사업자다.
LG전자는 비동기식 기술이 앞섰다고 주장하지만, 통신장비 시장점유율에서 삼성전자에 뒤져 있다.
데이콤의 유선전화와 전용회선은 한국통신에 밀리고,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하나로통신도 초고속인터넷에서 한국통신에 크게 뒤진다.
위성방송 쪽에서도 LG의 KSB컨소시엄을 주도한 데이콤의 통신 쪽 노하우가 사업권을 딴 KDB의 한국통신보다 뒤진다.
2등만 모인 LG의 ‘드림팀’은 이제 해체 여부를 질문받는 형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