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국 - “인종차별 기업을 단죄하라”
2003-05-30 최우성 기자
지난 5월19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한 재판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느 재판과는 달리 이번에 시작된 법적 공방의 당사자들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탓이다.
원고측은 과거 백인 소수정권에 탄압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 수천명이다.
반대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내로라하는 34개 글로벌 기업의 대표단은 피고석에 앉게 됐다.
바로 지난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위세를 떨쳤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공공연하게 지원했거나 혹은 인권을 유린하는 정책을 통해 커다란 이익을 얻었던 글로벌 기업들을 뒤늦게 심판대에 세우게 된 것이다.
이번 재판이 더욱 흥미를 끄는 데는 에드 페이건이라는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한다는 사실도 한몫한다.
페이건은 이미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당시 스위스은행 계좌에 맡겨뒀던 선조들의 예금을 되돌려달라는 유대인 피해자 후손들의 법적 소송을 맡아 스위스은행들로부터 12억5천만달러 규모의 보상금을 받아내 이름을 날린 바 있다.
페이건은 이밖에도 나치정권 당시 자행됐던 불법 강제노동을 둘러싼 오랜 소송에서 독일 정부와 독일 기업들로부터 52억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현재 이번 소송의 보상금 규모가 모두 1천억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페이건의 행보에 쏠린 관심이 대단하다.
34개 세계 유수 글로벌 기업 피고석에
소송을 이끄는 페이건은 피고로 지명된 34개 글로벌 기업들에게 보상을 받아낼 수 있는 법적 근거로 ‘외국인불법행위소송법’(ATCA)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TCA는 지난번 나치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조치를 이끌어내는 데도 결정적 근거로 작용했다.
미국 헌법 제정 직후인 1789년에 제정되어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는 이 법은 그간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명목상 규정처럼 취급돼왔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세계적으로 인권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뒤늦게 주목을 끌게 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업활동이 특정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이루어짐에 따라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행해진 기업범죄에 대해서도 이 법이 구속력을 지닌다는 분위기가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소송에서 피고로 지목된 기업들의 면면은 매우 화려하다.
우선 은행부문에선 UBS, 크레딧스위스, 씨티그룹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들 금융기관은 아파르트헤이트 당시 국제사회의 제재를 어긴 채 남아공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대출해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정부에 반대하는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위한 특수목적의 차량을 제작해 납품한 다임러크라이슬러도 뒤늦게나마 그 과거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밖에도 광산업체인 앵글로아메리칸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악랄하게 착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물론 해당기업들은 이번 소송과 관련해 아직껏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또 다른 당사자인 남아공 흑인정부가 이 재판에 부정적 견해를 밝히고 나선 게 이채롭다.
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지난 4월말 자국 문제가 해외법정에서 처리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론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재판 결과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제가 영향을 받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우세한 편이다.
특히 규모가 1천억달러에 이르는 남아공 최대의 연금기금은 이번 소송이 주가하락을 가져올 것이라며 부정적 태도를 밝히고 나서 주목을 끈다.
자신들의 노후생활을 설계하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탓이다.
이런 분위기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주교가 이끄는 진실 및 화해위원회(TRC)가 페이건 변호사측과 긴밀하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관심거리는 이번 재판결과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바라보는 미국 정부나 국민들의 시각을 읽어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는 데 있다.
우선 피고 리스트에 포함된 34개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계 기업에다 미국 자본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업체들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미국 국무부는 인도네시아 아체지역 노동자들을 대신해 국제노동권리기금이 엑슨모빌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넣어 비난을 산 전력이 있다.
국제테러리즘에 대해 펼치는 전쟁에 자칫 방해가 된다는 논거를 들이민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잣대 시험대 올라
마침 이번 소송과는 별도로 세계적 에너지기업 유노컬(Unocal)은 버마 독재정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면서 노동자들을 불법으로 고문하는 데 동참했다는 내용의 고소 사건에 휘말린 상태다.
칠레의 피노체트 치하에서 자행된 불법행위 등 다른 나라에서 진행된 인권탄압 사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미국으로서는 정작 자국 기업들의 어두운 과거를 고스란히 드러내야 한다는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소송 당시 유대계를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압력을 행사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던 것에 견주어 보면, 이번 재판을 바라보는 미국 정부나 국민들에게서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이번 재판 결과가 앞으로 상당한 파장을 미칠 것이란 지적도 귀기울일 만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시대의 화두로 등장한 상황에서, 당장 높은 수익률을 뽐내고 있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행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경우, 언젠가는 그 기업의 경제적 성과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사례가 여실히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을 두고 “투자결정이 내려지는 메커니즘 자체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넓은 잣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겨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