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삶]‘유럽 최대의 산업왕국’ 발렌베리는 삼성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2006-04-03 정남구/ <한겨레> 기자
에릭슨은 현재 140여 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지구상에서 이뤄지는 휴대전화 통화의 40%가 에릭슨이 공급한 장비를 통해 이뤄진다.
에릭슨의 주식 시가총액은 스웨덴 주식시장의 12%(2004년말 현재)를 차지한다.
물론 1위다.
에릭슨의 최대주주는 인베스터, 그 유명한 발렌베리 가문이 경영권을 갖고 있는 지주회사다.
에릭슨 하나만으로도 발렌베리 가문은 세계적인 기업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릭슨은 일부에 불과하다.
발렌베리 가문은 발전설비 분야의 ABB, 가전제품 분야의 엘렉트로룩스, 제지업체인 스토라엔소, 베어링업체인 SKF 등 각 분야 세계 1위의 기업 5개를 포함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14개 기업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이 경영권을 행사하는 자회사들은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스톡홀름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다.
<파이낸셜타임즈>는 발렌베리 가문을 ‘유럽 최대의 산업왕국’이라고 표현했다.
한 가문이 이렇게 나라 경제를 좌우할 정도라면, 국민들이 우려하지는 않을까? 발렌베리의 ‘적극적 오너십’ 조명
발렌베리 가문이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지난 2003년 여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스웨덴을 방문해서 기업 핵심인사들과 함께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 인베스터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발렌베리 가문은 150년 동안 스웨덴의 산업과 금융을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다.
한국을 먹여살리는 재벌로 평가를 받으면서도, 경제력 집중과 편법 상속 등의 이유로 자주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삼성과는 분명 다르다.
이건희 회장은 발렌베리 가문의 비결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성장사는 1856년 스웨덴 최초의 민간은행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의 창업자 오스카 발렌베리로부터 시작된다.
유럽의 후발주자였던 스웨덴에서 한국의 재벌과 비슷한 기업집단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은 부실기업을 사들여 구조조정하고, 이들 기업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산업왕국을 일궜다.
물론 대공황과 세계대전, 크고 작은 경기침체기를 거치면서 부침도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후계자들은 때론 변화를 주도하고 때로는 환경변화에 순응하면서 5세대를 거치는 동안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을 둔 것은 발렌베리 가문이 어떻게 사회적 존경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무릇 사람들은 앞서가는 자에게는 그만큼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기대한다.
발렌베리 가문도 여러 스캔들에 휘말리고, 사회의 공적으로 지목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발렌베리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호시절을 구가할 때 지나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과 대전 기간에 보인 친영파적인 행동이 문제가 되어 “스웨덴 국민들의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공격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2차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와 협력해 보쉬(자동차부품업체)의 미국 내 자산 동결을 편법으로 막아준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발렌베리 가문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간 것은, 무엇보다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그에 따른 실천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발렌베리 가문의 2세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외무장관을 맡아 나라에 봉사하기도 했고, 일찍부터 공익재단을 만들어 재산을 기부했다.
삼성과 발렌베리는 어떻게 다른가?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그 차이를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우선, 발렌베리는 삼성과 달리 기업도 그룹도 아니라는 점이다.
발레베리가 소유한 기업 어디에도 ‘발렌베리’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철저하게 자회사들의 독립경영원칙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는 ‘선장(경영자)이 우선, 배(기업)는 나중’이라는 경영철학에 따라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들에게 대부분의 소유기업들의 경영권을 일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임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적극적 오너십’을 실행해나간다.
삼성도 전문경영인을 활용하고는 있지만, 총수는 권한만 행사하고 전문경영인은 책임만 지는 이상한 방식을 취하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둘째, 발렌베리의 소유기업은 삼성처럼 복잡한 출자지분으로 얽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발렌베리 가문도 150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여러 차례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에 노출됐다.
발렌베리의 후계자들은 핵심기업을 지키기 위해 다른 기업의 지분을 과감히 포기하는 등 정공법으로 대응했고, 오늘날에는 지주회사를 통해 개별 기업의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다.
물론 ‘차등의결권주’라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무기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별 기업 차원에서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에 비해 삼성은 총수 일가의 지분은 아주 적고, 계열사들끼리의 순환출자에 의존해 총수의 경영권이 유지된다.
지주회사 시스템으로 가려면 일부 기업을 과감히 포기해야 하지만, 그럴 의지는 엿보이지 않는다.
발렌베리 가문이 1대주주가 아니면서도, 뛰어난 경영능력과 리더십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재벌문제 바라보는 시각 넓혀줘 발렌베리 가문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구조를 갖춘 것이야말로 삼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발렌베리 가문 소유기업들이 거둔 성과는 최대주주인 인베스터를 거쳐 최종적으로 발렌베리 재단으로 모이게 되어 있고, 재단은 수익금을 대부분 스웨덴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경영성과가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로 환원되게 하고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골치아픈 기업들을 팔아치우고 세금 없는 나라로 옮겨가는 대신,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만나 인식의 거리를 좁히는 데 애쓴 가문이라고 해도, 그런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성도 여러 가지 사회공헌 활동을 벌이고 있고, 최근에는 8천억원 사회 헌납 등 과거와는 다른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편법 상속 과정에서의 불법에 대한 검찰조사와 사회적 비난을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한 것인지, 진정으로 사회공헌의 확대를 위한 출발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 산업왕국의 신화적인 성장과정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보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경영자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재벌 문제는 한국사회의 핵심 화두 가운데 하나다.
시민사회에서도 재벌이 외환위기의 원인 제공자이며, 수술대에 올려져야 할 대상이라고 보는 쪽과, 한국경제를 성장시킨 핵심동력으로서 그 유용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쪽이 대립한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이 책은 재벌문제를 보는 시각을 크게 넓혀줄 것이다.
기업이나 경영자에 대한 책은 대상이 되는 기업이나 경영자에 대한 일방적 칭찬으로 귀결되기 쉽지만,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책 곳곳에 배어 있다.
정남구/ <한겨레> 기자 je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