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경제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문명의 이기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자동차를 꼽는다. 자동차만큼 삶의 패턴을 바꾸어 놓은 물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산업만큼 역동적으로 변화한 산업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동차의 생산 및 유통에서의 혁명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규정된 자동차범주로부터 자동차를 해방시키는 새로운 혁명이 출현하려 하고 있다. 20세기 자동차를 자동차라 부르게 한 것은 차체와 엔진과 운전자였다. 자동차는 사람이나 물건을 싫어 날라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차체이다. 이제까지의 차체는 편안하고 안전한 것을 지향하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 언제라도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통제 센터와 같은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이른바 스마트 카의 개념이다. 이제 차체를 구성하는 부품 중에서 냉연강판이나 합성수지나 유리, 카 시트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하고, 다양한 IT 용품들의 비중이 훨씬 커질 것이다. 둘째는 엔진이다.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들은 가솔린 엔진이나 디젤 엔진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왔지만, 수소전지차나 전기차는 엔진이 아니라 모터에 의해 구동된다는 점에서, 구동상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운전자다. 이제 운전자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와 경로만을 설정해 주면 알아서 데려다 주는 시대가 도래하려 하고 있다. 부주의하여 실수하는 인간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들이 아니라, 운전자를 대신해 줄 시스템이 등장하는 것이다. 차체와 구동기관과 조작체계가 모두 변화된 새로운 자동차 세계가 출현할 것인데, 그것은 이제까지 있었던 혁명 못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서구에서 자동차의 태동기에 해당하였던 장기 19세기 동안 한국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한국의 장기 19세기는 번영의 시대가 아니라 위기의 시대였다는 수량경제사적 문제 제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19세기 조선왕조는 아직 근대 자동차 문명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자동차는 엔진이 말을 대체한 것으로서 마차 문명의 연장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왕조를 떠받치는 육운의 체계는 마차 문명이 아니라 지게 문명이었다. 마차나 수레가 별로 쓰이지 않았음은 한국의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레는 고작 함경도의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정도였다. 한국은 산과 계곡과 실개천들이 많은데, 바퀴 달린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특히 어렵게 하는 것은 개천이었다. 개천에는 징검다리를 놓아서 사람의 이동의 편의를 도모하였지만, 징검다리는 바퀴 달린 운송수단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지게꾼에 의한 운반체계와 지게꾼 밖에 다닐 수 없는 도로체계는 지게처럼 서로를 지지해 주고 있었다.
도시의 도로,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는 상당히 좋아졌다. 20세기 전반 자동차 보급은 이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여전히 농업사회였는데, 농촌은 아직 자동차 문명의 이역에 있었다. 1920년대 담배는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전매사업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농민들이 그 담배를 어떻게 사서 피우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우선, 각 농촌까지 담배를 배달하는 것이 문제였고, 담배를 판매해 줄 담배가계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였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여러 사람의 지혜를 빌리는 게 방책일 수 있는데, 현상공모가 그것이다. 조선총독부 전매국도 이 난제를 풀 수 있는 묘안을 공모하였는데, 그 당선작이 제시한 방법을 보면 당시 농촌의 도로 실태를 알 수 있다. 담배를 각 농촌에 배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나 말의 등에 싫어서 운반하는 것이고, 판매는 구장이나 이장 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전반 한국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아직 한국에 완성차 제조업체는 출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그것을 외국에 보내서 수리할 수는 없었다. 자동차가 많은 곳은 수리업이 생겼다. 한국 자동차 수리업의 효시는 황실의 자동차를 수리하였던 인사동의 강천(江川)자동차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수리업은 A/S용 자동차 부품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한국에는 완성차 제조업체는 없었지만, 이렇게 자동차 수리업과 자동차 부품제조업은 발전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인들이 이 사업을 주도하였지만, 한국인 사업체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경성보디, 경성서비스, 중앙모터스, 삼화모터스, 대동모터스, 경성공업사 등등이 한국인 사업체들인데, 아직 규모는 영세했고, 만드는 품목도 제한적이었다.
시발자동차는 당시 일본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고품격의 세단 자동차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고품격의 세단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까? 그 방법 중의 하나는 선진 외국의 자동차 업체들로부터 중간분해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것이다. 1962년에 새나라 자동차가 일본제 블루버드 승용차를 중간분해부품으로 수입하여 조립 생산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완전 국산화된 품격 높은 승용차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중간분해부품을 수입해서 조립 생산하는 것이 자동차 부품업체와 완성차 업체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만간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 자동차 부품생산 능력은 일본에 비할 때 기술적으로 매우 떨어졌다. 따라서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쓰면, 자동차의 성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생산비도 올라갔다. 완성차 업체는 비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부품을 쓸 유인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완성차 업체가 부품업체의 기술 및 생산성 향상을 지도해 줄 능력도 없었다. 중간분해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하는 것은 한국 자동차부품 업체를 옥죄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부품업체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국산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방안이 중간분해부품이 아니라 완전분해부품을 수입하고, 부품업체를 완성차 업체에 계열화하는 것이었다. 1966년 신진자동차에 의한 완전분해부품 조립 생산체계가 이렇게 하여 출현한 것이지만,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돌파구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 마련된다. 우선, 그런 사람을 찾아서, 그가 자동차 산업을 개척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신진자동차보다 더 효율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에 자동차 생산의 문호를 연 것이다. 이 기회에 도전한 것이 바로 현대였다. 1967년 현대는 포드와 기술제휴를 맺고 자동차 산업에 진입하였다. 당시 현대가 포드와 맺은 기술제휴 계약문서를 보면,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 계약 문서들은 현대가 자동차 부품 국산화, 부품 구입비의 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 월남, 오끼나와에 군납형식이기는 하지만 수출하겠다는 의지 등이 담겨져 있었다.
1962년 이래 한국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지만, 왜 성공하지 못하였는가? 이에 대한 통렬한 자기 성찰이 없다면, 이 계획도 그 이전의 많은 계획과 마찬가지로 또 한번의 허망한 시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전의 육성정책이 왜 실패했으며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1969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74년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은 지난 5년 동안 고안된 방안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1974년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의 성격은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전망’이 잘 보여준다.
(1) 한국의 자동차공업은 외국자동차 제조회사와 같이 Body 및 Engine 등의 중추부품생산시설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즉 “자동차제조” 회사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독자적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서 수입부품에 의존한 조립기능밖에 발휘못함에 관련산업인 기계공업분야의 발전문제와 큰 유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2) 그리하여 현금의 KD조립 생산방식의 지속시 외국 대기업의 “부품생산거점의 다국간 분산정책”으로 국산화되는 일부부품의 양산화는 촉진될지 모르나 국산화 안 된 중추부품의 항구적 수입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동차의 완전국산화 불능으로 자동차공업과 관련산업의 발전은 저해되며, 외국차형은 또한 빈번한 모델변경으로 장기간 계속 생산이 곤란하며 결과적으로 소량생산되어 원산지보다 가격고와 품질불량을 초래하여 완전 국산화해도 수요유발과 수출시장 개척이 곤란하게 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라 매년 증가될 자동차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는 한국실정에 부적합한 외제차량 조립보다 유류소비 절약을 기할 수 있고 빈번한 모델 변경이 없는 경제적인 한국형 차량 양산과 완전국산화를 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단호했다. 고유모델을 가지고 엔진공장 등을 포함한 종합자동차공장을 짓고, 경제규모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래야 자동차공업이 한국의 기계공업과의 유기적 연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으며, 그래야 중화학공업화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이와 같은 강한 의지와 이 의지에 동참하는 기업에 대해서만 지원하겠다는 강한 시사는 기업들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은 한국의 자동차 공업의 독자적 발전 경로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국제 경쟁력이 있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 이후의 역정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9년부터 위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제2차 오일쇼크와 1980년대 전반의 한국 외채위기 속에서 자동차 산업을 육성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비관론도 있었으며, 잘못된 선택의 폐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해 합리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액션도 있었다. 1980년대 초 합리화 조치는 별로 성공적인 정책이 아니었으며, 1986년부터 시작된 삼저호황은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드리워졌던 암울한 그늘을 모두 날려버렸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본격적인 도약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 모터리제이션이 시작되고 있었고, 한국 자동차 기업들의 기술력이 강화되면서 해외 시장에서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산업은 활짝 피워올랐다. 1995년 한국은 세계 제5위의 자동차 생산강국이 된 것이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IMF체제는 세계 자동차 산업의 네 번째 혁명과 연동되어서 전개되었다.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은 비록 국가와 재벌간의 위험공유체제 속에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세계 제5위의 자동차 강국이라는 지위가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차체와 엔진, 파워 트레인 시스템 등 자동차 주요 부품에 있어 이미 세계 선진기업들과 경합할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결여되었던 것은 글로벌 시장의 변화와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었다. IMF체제는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화였다. 현대·기아차 그룹은 글로벌 기업으로의 변신하였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자동차도, 르노삼성과 GM대우라는 형태로 글로벌 생산체제의 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어찌보면 자동차 산업의 경우, IMF체제를 거치면서 20세기 자동차 산업에서 발생한 4가지 혁명적 성취를 모두 끌어안은 산업으로 변화되었다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역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세계가 어느 만큼 변화될 수 있는가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경험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세계는 변화되어 갈 것이다.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닌 것이 될 것이고, 우리 생각하는 산업 구분은 더 이상 유의미한 구분의 체계가 아닌 것이 될 것이다.
혹자는 앞으로 제조업의 시대가 아니라 서비스업의 시대가 될 것이라 이야기 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학 이론이 보몰의 역설이다. 생산성 증진이 높은 산업은 점점 생산성이 높아져서, 가격이 하락한다. 그래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든다. 반면, 생산성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은 그대로여서, 생산성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이다. 생산성의 증진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영역은 제조업이고, 생산성의 증진이 일어나지 않는 영역은 서비스업이므로, 산업에서 제조업의 비중은 줄고 서비스업의 비중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한 가지의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재화가 서비스를 대체하지 않는다고 가정이다. 그러나 많은 서비스는 재화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안마 서비스는 안마의자가 대신할 수 있으며, 청소 서비스는 로봇 청소기가 대신할 수 있다. 서비스는 기계화될 수 있다. 최근 3D 프린터가 주목받고 있다. 현대·기아차에서 신모델의 시제품을 만들 때 3D 프린터를 사용한다고 한다. 기존의 기계화는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작업기를 만들고, 그 작업기를 원동기로 작동하는 체계였다. 3D 프린터는 작업기에 있어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일회적이며 복잡한 것, 그래서 기계화되지 못한 것, 사실 서비스업은 이러한 영역에 많이 존재하는데, 이제 이 영역도 기계화될 것이며, 그 시대를 열어가는 첨병이 3D 프린터라 할 수 있다. 자동차가 자동차가 아닌 것으로 되는 시대는 서비스가 서비스가 아닌 시대로 되는 것과 더불어 진전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가 미래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사라져 가는 산업 구분의 체계 속에 미래를 억지로 집어 넣으려는 시도 이상이 아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산업을 키울 것인가라는 20세기적 산업육성정책이 아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커다란 스마트폰으로 생각도 해보고, 바퀴달린 축전지로도 생각해 보고, 이동하는 집무실로도 생각해 보고, 그에 대응할 수도 있는 방안을 만들어 내는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창의력은 현재를 넘어서는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위해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추동력이다. 이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족쇄는 불안감으로 현재의 시스템이 주는 렌트의 체계에 사람들이 목매달게 하는 것이다. IMF 체제가 결코 축복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미래의 기대를 미래의 불안으로 바꾸고, 그 위에 자기의 시스템을 구축한 불안의 경제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경제시스템이 지속하는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 있다면 오직 불안한 미래와 그 속에 한참 오그라든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제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기업가나 산업정책가는 심리학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불안을 느끼고 어떻게 하면 불안을 느끼지 않는지,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래서 얻어지는 창의력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추가적인 조치들이 필요한지, 고민하여야 한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시대는 오원철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의 엔지니어링 어프로치의 시대였다면, 1980년대 이후의 시대는 고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경제학적 어프로치의 시대였다. 그러나 모두 과거일 뿐이다. 이제는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심리학적 어프로치 혹은 인간학적 어프로치가 필요한 때이다. E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