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21 윤종인 편집기획위원] 한국은행은 3월 26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4월부터 3개월간 일정 금리수준 하에서 시장의 유동성 수요 전액을 제한없이 공급하는 주단위 정례 RP매입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였다. 이를 두고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는 사실상의 양적 완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현재의 경제상황이 미국 금융위기 당시보다 어렵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다.
통화정책은 어떻게 집행되는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지자 한국은행은 지난 3월 16일 기준금리를 1.25%p에서 0.75%p로 0.5%p나 인하하였고, 19일에는 6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왑을 체결한 바 있다. 또한 26일에는 한국판 양적 완화로 불리우는 ‘전액공급방식의 유동성 지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한국은행은 현행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모든 정책수단을 쓰게 되었다.
중앙은행이 사용하는 정책을 통화정책이라고 말한다.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시중에 공급하는 유동성을 조절하는 정책이다. 예를 들어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앙은행은 시중에 보다 많은 통화량을 공급한다. 통화정책으로는 지급준비율 조절, 재할인대출과 함께 공개시장운용이 있다. 이 중에서 공개시장운용이 널리 이용되고 있으며, 한국은행도 이를 통해 시중에 공급되는 유동성을 조절한다.
공개시장운용이란 한국은행이 약정을 맺은 금융기관(주로 은행)과 채권을 거래하는 방식으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방식이 환매조건부채권(RP: Repurchase)을 거래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RP매입과 RP매각이 있다. 이 중에서 시중에 더 많은 통화를 공급하려면 한국은행은 RP를 매입해야 한다.
RP매입이란 금융기관이 보유한 채권을 한국은행이 매입하면서 일정 기간 후에 되팔기로 하는 계약을 말한다. 따라서 RP매입 시점에서는 금융기관이 보유한 채권을 한국은행이 사들이기 때문에 그 댓가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게 된다. 반면에 만기가 되면 한국은행은 사들인 채권을 다시 금융기관에 팔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게 된다.
앞에서 기준금리를 0.75%p로 인하하였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한국은행이 RP거래를 통해 금융기관과 채권을 거래할 때 적용되는 RP금리를 0.75%p까지 낮추겠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채권이자율과 채권가격은 반비례하므로) 한국은행이 보다 많은 RP를 매입할수록 RP가격은 상승하고 RP금리는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 RP금리가 0.75%p보다 높다면 한국은행은 RP금리가 0.75%p까지 떨어질 때까지 RP매입을 시도한다. 물론 RP매입은 시중에 유동성 공급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결국 기준금리가 0.75%p라는 정책은 RP금리가 이 수준에서 유지될 정도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정책이다.
‘전액공급방식의 유동성 지원제도’
그렇다면 한국판 양적 완화는 무엇인가? 한국은행은 RP매입을 입찰할 때 기준금리+10bp를 상한으로 모집 금리를 공고하고, 한도 제약 없이 모집 전액을 배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현재 기준금리가 0.75%p이므로 10bp를 더한 0.85%p까지 입찰한 모든 RP를 한국은행이 무제한적으로 매입하겠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은 이 정책을 4월~6월 동안 실시할 예정이고 경제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7월 이후에도 연장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본래 한국은행의 RP거래에는 7일물~91일물이 있으며 이 중 7일물과 14일물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발표에 따르면 만기가 가장 긴 91일물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은행과 RP매매를 할 수 있는 금융기관은 17개 은행과 5개 비은행 금융기관이었는데, 여기에 추가하여 통화안정증권‧증권단순매매 대상기관 7개와 국고채 전문딜러 4개와도 RP매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끝으로 RP거래의 대상이 되는 채권도 기존에는 한국전력공사,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이 발행하는 특수채로 국한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공공기관 발행채권 8개와 은행채를 추가하였다.
쉽게 말하면, ‘보다 더 많은 금융기관’과 ‘보다 더 많은 채권’을 대상으로 ‘보다 더 장기’의 RP를 0.85%p 이하에서 무제한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행의 RP매입 규모는 엄청나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의 회견에 따르면 추가적으로 공급되는 유동성은 최대 70조원에 이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008년 미국의 양적 완화
이제 양적 완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007년 9월 미국 4위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 브라더스가 인수자를 찾지 못하고 파산했다. 위기는 서브프라임모기지(sub-prime mortgage)에서 시작되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란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 하는 주택담보대출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가 증가하자 주택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였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은 언젠가 끝나게 마련이다. 주택가격 상승이 멈추고 하락세로 돌아서자 가장 먼저 부도가 발생한 곳은 서브프라임모기지였다.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이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의 부실이 급증했는데, 직격탄을 받은 금융기관이 리먼 브라더스를 포함한 투자은행들이었다. 물론 투자은행들이 서브프라임모기지를 직접 판매하지는 않았다. 투자은행들이 부실해진 이유는 신용부도스왑(CDS)을 거래했기 때문이다. CDS는 어려운 파생금융상품이지만 쉽게 말하면 서브프라임모기지에 대해 보증을 서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서브프라임모기지에서 부도가 나면 CDS를 거래한 투자은행에게 엄청난 손실이 발생한다.
당시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도 위기에 빠졌는데, 그 이유는 AIG의 자회사가 CDS를 거래했기 때문이다. 사실 보험회사가 파산하면 정말로 감당하기 어렵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재무성과 연준(FRB)은 AIG를 포함한 월가의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어 당시 지원을 받았던 AIG는 구조조정을 통해 현재의 AIA로 바뀌었다.
위기 상황에서 경제학자 벤 버냉키(Ben S. Bernanke)가 등장했다.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그는 (우리나라의 기준금리에 해당하는) 연방기금금리를 거의 0%까지 낮추었다.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연준이 취할 수 있는 정책은 없어 보였지만 버냉키에게는 준비된 초유의 정책이 있었다. 바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이다.
중앙은행은 금융기관이 보유한 채권을 사들임으로써 (채권의 가격을 올리고 채권의) 금리를 낮춘다. 그러므로 금리가 0%까지 떨어지면 더 이상 중앙은행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버냉키는 금리가 0%가 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금융기관이 보유한 채권을 사들이기로 했다. 이것이 양적 완화이다. 이에 따라 시중에는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공급되었다. 위기에 몰린 금융기관을 살렸으며 폭락을 거듭했던 주식가격을 끌어올렸다. 애초부터 뇌관이었던 주택가격의 하락도 막을 수 있었다. 정상적인 정책이 아니라는 평가도 많지만 양적 완화가 아니었더라면 미국의 금융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양적 완화는 영원한 정책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 사용되는 불황대책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경제가 회복되면서 버냉키 의장은 양적 완화를 줄이는 테이퍼링(tapering)에 착수했고, 양적 완화가 끝나자 후임 연준 의장이었던 재닛 옐런은 출구전략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2020년 경제위기는 다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자 미국의 연준은 금리를 신속히 인하하였고 또 다시 양적 완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와 2020년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주택시장에서 시작하여 금융기관으로 퍼진 위기였다. 따라서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을 지원해야만 했다. 금융기관이 위기에 빠지면 결국 실물부문으로 위기가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2008년에는 금융시장에서 발생한 위기가 실물경제로 파급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실물부문에서 시작되어 금융시장으로 파급되는 양상이다. 물론 금융시장에 유동성 공급을 늘리는 정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와중에 금융기관마저 위험해진다면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위기의 출발이 실물부문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에서 금융시장의 안정성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충분조건은 실물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은 한국은행이 아니라 여전히 정부의 손에 남아있다.
한국판 양적 완화를 발표하자 한결같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한국은행이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해서 그 유동성이 가계와 비금융기업으로 흘러가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연준처럼 한국은행도 회사채를 직접 사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아직까지 미국식 양적 완화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판 양적 완화를 결정하기 전에 금융통화위원회는 '한은의 공개시장운영규정과 금융기관대출규정' 개정안을 의결해야 했다. 현재 한국은행은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언젠가 미국식 양적 완화를 해야 한다면 이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지금부터 마련해 두는 것이 좋겠다.
실물경제 살리기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실물경제에서 시작되었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양적 완화라고 하더라도 실물경제발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결국 정부는 실물경제를 살리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항공업계와 여행업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정상적인 영업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매출액이 급감하니까 채무를 갚을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물경제에 가해진 충격이 채무 위기로 이어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양적 완화를 해서 금융기관의 안정성이 확보되더라도 금융기관이 부도 가능성 있는 기업의 회사채를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에게 면책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더 쉬운 방법은 정부가 이들 비금융기업의 회사채나 CP를 보증하고 만기를 연장하거나 차환을 돕는 것이다.
일부 지자체의 경우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으로 보이는데, 복지정책일지는 몰라도 불황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불황대책이 되려면 재난기본소득을 받은 사람들이 이를 소비해야 하는데, 재난기본소득이 얼마나 소비로 이어질 것인가는 의심스럽다. 공포감 때문에 외식을 하지 않고 있는데, 재난기본소득을 받았다고 외식에 나서고 여행을 갈까? 마치 한국은행이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지원해도 그것이 가계와 비금융기업에 흘러가지 않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실물경제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묘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물론 획기적인 대책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업 현장에 있는 사람들보다 실물경제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공급사슬(supply chain)이 끊어졌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면 이를 복원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포함한 모든 시도를 해야 한다. 마치 일본이 불화수소 등에 대해 수출 규제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던 것과 같은 노력을 이번에는 전방위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한국은행이 유동성 공급을 늘리면 시중에는 유동성이 풍부해진다. 문제는 증가한 유동성이 어디로 가는가이다. 실물경제가 정상적이라면 정상적인 곳으로 유동성이 가게 마련이다. 가장 좋은 경우는 풍부해진 유동성이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되어 기업활동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시장으로 흘러갈 것을 우려한다. 풍부해진 유동성이 왜 기업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이 문제는 정말로 중요하다. 기업의 활력이 떨어져서 투자할 만한 기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부동산투자가 좋다고 생각하게 되면 증가한 유동성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므로 핵심은 기업의 활력을 제고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한국판 양적 완화도 기업활동을 촉진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보다는 기업의 영업활동이 최대한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더 근본적이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전방위적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을 지지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전례를 따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만큼 그동안 기피해 왔던 정책들도 실용적인 관점에서 다시 검토하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이코노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