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난 12년간 자산가치 하락을 경험했고, 6년이나 물가하락을 겪었다.
이제 탁상공론은 필요없다.
당장 디플레이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 메릴린치증권 예스퍼 콜 수석연구원은 3월25일 일본은행(BOJ) 후쿠이 도시히코(67) 신임 총재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후쿠이 총재가 25일 비상정책회의를 소집하며 취임 뒤 내디딘 첫 행보에 대한 반응이다.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후쿠이 총재는 지난 3월20일 전임 하야미 마사루에 이어 총재 자리에 취임했다.
그는 1958년 일본은행에 입사한 전형적 BOJ맨이다.
94년에는 부총재까지 올랐으나, 98년 3월 한 직원의 뇌물수뢰 파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는 통화정책에 관해 비교적 보수·온건파에 속한다.
문제는 일본이 만성화한 디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려온 탓에 공격적 통화정책을 요구하는 안팎의 목소리가 거세다는 데 있다.
그 대표적 주장이 ‘일정한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설정해놓고 외국 채권 매입 등을 통해 통화 공급량을 크게 늘리라’는 것이다.
총재 자리를 놓고 끝까지 경합을 벌였던 급진파 나카하라 노부유키 전 BOJ 이사가 대표적 주창자다.
고이즈미 총리도 신임 총재의 요건으로 ‘디플레이션 극복에 적극적일 것’을 꼽기까지 했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후쿠이 도시히코에게 돌아갔고, 이라크전 발발과 함께 그의 첫 행보에 큰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25일 열린 비상정책회의는 98년 일본은행법 제정으로 일본은행이 독립한 이래 처음으로 소집된 것이다.
따라서 시장은 뭔가 강력한 통화완화 정책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넘쳐났다.
한 외국인 투자자는 “일본 재무성과 일본은행이 엔화 약세의 필요성을 공감했으며, 통화정책에 대해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일본은행은 부실더미에 앉은 시중은행이 보유한 주식을 더 많이 매입하기로 했지만, 눈에 띄는 디플레이션 대책을 내놓지 않고 기존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이라크전 장기화 전망에서 비롯한 엔화 강세 흐름은 꺾이지 않았고, 주식시장의 낙폭도 커졌다.
통화팽창에 부정적인 후쿠이 총재의 철학에 비춰 예상 못한 결과는 아니지만, 때가 때인지라 부양책을 기대했던 시장의 실망이 컸기 때문이다.
이날 후쿠이 총재는 “시중은행 보유주식에 대한 매입한도를 기존 2조엔에서 3조엔으로 늘릴 것이며, 전쟁으로 인한 금융시장 교란을 막기 위해 유동성을 충분히 투여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일본은행은 이례적으로 시중은행 보유주식을 직접 사들이기 시작했다.
3월 중순 현재 일본은행은 1조300억엔어치의 주식을 보유중이다.
이제 그 한도를 3조엔까지 확대하고, 은행당 한도도 5천억엔에서 7500억엔으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예스퍼 콜 메릴린치증권 수석연구원도 일견 수긍을 표시한다.
지금 시점에서 시중은행 주식을 매입하는 것이 통화정책을 바꾸는 것보다 기술적으로 더 적절할 수 있지만, 문제는 시장의 정서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후쿠이 총재는 훌륭한 과학자일지 모르지만, 좀더 훌륭한 예술가가 돼야 한다”라고 꼬집었다.
후쿠이 총재는 26일 “상장지수펀드(ETF)와 리츠 등 여러 시장에서 자산 매입에 나설 것”이라고 추가로 밝혔다.
그가 4월초 열릴 예정인 첫 정례 정책회의에서 어떤 카드를 추가로 들고나올지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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