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동네 슈퍼를 드나들며 과자를 사먹던 경험으로 보면 모든 과자의 가격이 동일했다.
그런데 요즘은 동네 구멍가게의 가격, 편의점의 가격 그리고 대형 할인마트의 가격이 모두 다르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천차만별인 가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판매하는 곳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 않는 대표적인 상품은 책이다.
책의 표지 뒤에 쓰여 있는 가격과 실제 판매가격이 다르지 않도록 규제하는 제도를 도서정가제라고 부른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재판매가격유지(RPM, Resale Price Maintenance)라고 부른다.
재판매가격유지(행위)란 생산자와 판매자가 구분되어 있을 경우, 판매자가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매할 때 부르는 가격을 생산자가 영향력을 행사해 결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서 ‘재판매’란 생산자가 판매자에게 판 제품을 판매자가 소비자에게 다시 판매한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에게 권장소비자가격으로 많이 알려진 이것은 사실 생산자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판매자간의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로서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바가지를 씌우는 소매점의 행태를 막기 위해서는 권장소비자가격이 제품 포장지에 인쇄되어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용산전자상가를 가면 흥정하는 판매상들 앞에서 늘 찜찜한 것처럼, 판매자가 소비자 면면을 봐가면서 가격을 부르는 경우 조금이라도 더 돈을 주고 산 사람은 억울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흥정 없이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다.
이같이 소매업자가 다수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특정한 물건을 팔 때 반드시 가격표를 붙이도록 하는 제도를 가격표시제라고 한다.
가격표시제와 재판매가격유지는 다른 것이다.
재판매가격유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도 가격표시제가 시행될 수 있다.
대형할인마트에 가면 제품의 가격은 모두 표시되어 있지만 동일한 제품이라도 가격이 다를 수 있다.
재판매가격유지는 일반적으로 불법이지만 가격표시제는 정반대로 합법이며 권장되는 사항이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자. 도서정가제는 책 판매에 한하여 재판매가격유지행위를 합법화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출판사의 영업에 도움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출판사의 영업을 돕는 이유는 출판사가 단순히 영리만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통의 자산인 지식의 생산에 중요한 공로자이며 이들이 번성할 때 사회 전체가 더 큰 이익을 누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으며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헌책방의 책값은 어떨까? 헌책방의 책값은 그야말로 완전자유경쟁시장의 가격이다.
헌책은 정의상 더 이상 새로 생산되지 않는 책이며 웬만큼 수요가 많지 않고서는 출판사에서 새로 찍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회에 존재하는 책 스톡(stock) 전체는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헌책의 가격은 수요자가 얼마나 찾느냐, 얼마의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느냐에 따라 대체로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헌책방의 가격은 책에 대한 세월에 의해 연마된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주식시장의 주가가 기업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지만 돈을 쫓는 이들의 투기적 동기에 의해 출렁이는 주가와 달리 헌책방의 가격은 교양 있는 이들의 지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며 장기적 결과는 집단적 이성의 현신으로 보인다.
헌책방은 도서의 주식시장이기도 하면서 새책에 대한 구매를 촉진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헌책방의 성장은 단기적으로 새책의 구매를 억제하는 속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헌책방과 새책방이 제로섬 게임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헌책방이 활성화될 경우 수요자 입장에서 새책을 구매하는 경우 발생하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책을 경험재(experience good)라고 분류한다.
읽어보지 않으면 그 책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읽어보고 나면 그 책을 구매할 이유가 없는 기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책을 구매하기 전에는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만약 실망스러운 내용이라면 지불한 돈을 날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헌책방의 거래가 활발하다면 수요자는 일부의 비용이라도 재판매를 통해 건질 수 있고 이에 따라 수요자의 새책 구매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최근 일본의 헌책방 지점이 서울에 문을 열었다.
이 책방은 기업형 헌책방으로 1990년 5월 설립돼 일본 전국에 850개의 체인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번에 서울에 문을 연 이 지점은 하와이, 로스앤젤레스, 파리 등에 이어 9번째 국외지점이라고 한다.
사실 일본은 대단한 규모의 헌책방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헌책방은 아직은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압축성장을 거듭한 우리 사회의 경험을 볼 때 지금 수준에서 헌책방이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급성장하여 세계적인 수준으로 뛰어오른 유아 도서시장, 대학입시제도의 변화로 인해 불어닥친 논술 열풍 그리고 세계 1위의 보급률을 자랑하는 초고속인터넷은 조만간 헌책방 압축성장의 기폭제가 되리라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해본다.
김혜원/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puttyclay@msn.com 1968년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세상을 항상 경제(학)적으로 해석하는 이코노(믹스)홀릭이지만, 머릿속 한편에는 늘 인문학적 상상력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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