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유로존③-유로존의 탄생과 평가>
2012년 3월 바로소(Jose Barroso) EU 집행위원장과 롬푸이(Herman Van Rompuy) EU 상임의장은 핵안보 정상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스 총선을 두 달 남짓 남기고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일명 Grexit) 가능성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두 정상은 국내 경제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유로존의 미래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유로화 체제의 불가역성(irreversibility)을 역설하고 유로화가 유럽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정치적 프로젝트(political project)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EU를 대표하는 두 정상이 유로화 체제가 역진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나섰다는 것은 유로화 체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애착과 위기감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유로화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유럽여행일 것이다. 국내에 배낭여행이 활성화된 시기는 유로화가 도입되던 2000년대 초와 맞물린다. 과거에는 유럽여행 시 방문하는 국가별로 환전을 해야 했으나, 오늘날 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유로화 하나만 있으면 모든 거래가 가능하다. 현재 유로화는 EU 회원국 중 18개국에서 활용되며, 미달러와 함께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화폐이다. 사실 동유럽과 아프리카의 일부국가들도 유로화 대비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로화는 40여 개국에서 공식화폐 또는 기준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유로화와 유로존은 세계경제의 큰 축을 이루고 있으나 2010년 촉발된 유럽재정위기는 봉합과 재현을 반복하면서 세계경제의 하방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다. 특히 위기의 성격이 일부 국가의 재정위기인지, 아니면 유로존 ‘체제의 위기’의 위기인지에 관한 논란 속에서 유로존의 대외적 위상은 점차 악화되고 있다. 유로화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유럽통합의 핵심이라면, 재정위기와 수년간 계속된 경제적 불안은 ‘유럽회의주의(Eurosceptism)’가 확산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로화 도입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도입과정에서의 찬반논란과 유럽재정위기 이후 이른바 ‘유로존 구하기(Saving Euro)’가 어떠한 배경 하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유럽의 통화통합
유로화 체제의 법적근거는 1992년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지만 유럽 내 통화통합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 체제가 출범할 때부터 유럽 국가들은 역내 화폐 간의 고정환율제도를 선호하였다. 유럽국가들은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 초 경쟁적인 평가절하와 이로 인한 무역체제의 혼란을 경험하였고, 전후에는 안정적인 환율제도의 구축을 갈구했다. 더구나 1958년 오늘날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출범하고, 1962년 막대한 농업보조금을 골자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이 실시되자 역내자유무역과 공동시장의 유지를 위해서는 공동체 차원의 통화협력이 더욱 절실하였다. 이때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거시경제정책 차이는 공동체 내부에서 종종 환율갈등을 야기하였다. 제조업 경쟁력이 강했던 독일은 역내교역에서 흑자를 기록하였고, 물가안정에 초점을 둔 통화억제정책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상황은 반대인 경우가 많아 독일 마르크화에 대한 평가절상과 프랑스 프랑화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이 발생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럽의 통화통합을 위한 더욱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였고, 당시 EEC의 집행위원회는 룩셈부르크 경제장관인 베르너(Pierre Werner)에게 통화통합을 위한 로드맵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70년에 제출된 일명 ‘베르너 보고서(Werner Report)’는 1971년부터 10년의 이행 기간을 걸쳐 3단계로 구성된 경제통화공동체를 구성할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3단계는 EEC 회원국 간 완전한 고정환율제채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유로화 체제와 별반 다름이 없는 체제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미국의 금태환 포기선언과 연이은 석유파동 등 국제금융시장의 불안 속에서 통화통합을 위한 계획은 추진되기 어려웠다.
흥미로운 점은 1970년을 전후하여 독일과 프랑스가 통화통합의 추진방식에 있어서 명확한 이견을 보였다는 점이다. 독일은 경제정책의 수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경제통화공동체를 이룩해야 한다는 ‘선수렴, 후통합’의 입장을 견지한 반면, 프랑스는 국가 간 경제정책의 수렴을 위해서는 먼저 제도적 틀을 구축하는 ‘선통합, 후수렴’의 원칙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는 양국이 통화통합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달랐던 데에 기인한다.
1970년대 초 국제통화제도의 과도기에 EEC 회원국들은 ‘스네이크 체제’로 명명된 관리환율변동제도를 운영하였고, 이후 1979년에는 보다 진전된 유럽통화체제(EMS: European Monetary System)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EMS의 골자는 유럽통화단위(ECU: European Currency Unit)라는 가상의 바스켓 통화를 만든 후 EMS 회원국의 환율을 ECU에 고정시키는데 있다. ECU는 EMS 참여국의 통화를 무역량을 기준으로 가중평균하여 구성되었는데, 오늘날 유로화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각국은 ECU를 기준으로 자국화폐의 변동폭을 ±2.25 내로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독일의 제안이다. 독일은 ECU를 축으로 한 환율유지 외에도 각국 화폐간의 환율조정 폭을 제한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사실상 각국 화폐간의 환율이란 독일 마르크화 대비 각국의 환율을 의미한다. 이 조치는 여러 통화의 가중평균으로 인해 ‘물타기’가 된 ECU 대신에 보다 경화인 마르크화를 환율변동의 축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결국 EMS 내의 환율조정은 ECU와 마르크화의 두 개의 축을 통해 이루어진 셈인데, 이는 EMS 도입에 있어서 독일과 프랑스의 관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독일은 마르크화의 과도한 평가절상 방지와 물가안정에 주안점을 두었던데 반해, 프랑스는 EMS를 장기적인 통화통합의 중간과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독일의 통일과 유로화
EMS는 1980년대 유럽 내 통화제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나,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고정환율에 근간을 둔 관리변동환율제도였다. 단일통화 도입을 위한 노력은 1980년대 말부터 급속도로 진행되었는데, 독일의 통일이 숨겨진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의 통일이 임박하자 유럽통합의 오랜 동기였던 ‘독일 문제(German question)'가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독일의 재부상을 우려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부과했던 베르사이유 협약 방식의 전후질서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대안을 모색할 것인지에 대한 기로에 선 것이다. 당시 유럽통합의 선구자들은 독일을 유럽통합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독주를 막고, 유럽의 질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통일독일을 눈앞에 둔 유럽 국가들은 40년 전의 문제에 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다.
통일된 독일의 부상에 대해 유럽 주변국의 대응방향은 EU 통합과 EU 기구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통화통합과 스케쥴에 대한 독일의 적극적 수용여부는 독일이 EU 공동체와 유럽통합에 얼마나 충실한 관심을 보이는지의 테스트로 간주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독일 통일에 대한 지지조건으로 단일화폐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독일의 콜(Kohl) 총리는 초기에는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긴급한 통일문제의 해결과 유럽 내 고립을 피하기 위해 유로화 도입을 수용하였으며, 이후 유로화 도입을 위한 적극적인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 유럽금융시장의 불안도 유로화 도입을 촉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통일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지출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우려되자 독일연방은행은 금리인상을 통해 물가상승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EMS 체제 하의 환율변동폭 유지를 위해서는 다른 국가들도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치는 다른 국가들의 통화가 시장의 인식에 비해 고평가되는 결과를 낳았고, 중앙은행의 환율방어 능력을 의심한 투기세력은 1992년 9월에 영국 파운드화와 이탈리아 리라화에 대한 매도를 감행했다. 흔히 ‘검은 9월’로 묘사되는 통화위기 속에서 영란은행은 한 달 간의 환율방어 끝에 EMS를 탈퇴하였고, 이후 유럽의 통화통합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위기 직후 EMS 내의 환율변동폭은 ±15%로 확대되어 사실상의 변동환율제가 되었는데, 이때야 비로소 환율은 진정될 수 있었다. 국경 간 금융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EMS와 같이 불완전한 고정환율제도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이 위기의 교훈이었는데, 이 교훈은 유로화 도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유로화 도입에 대한 반대 입장
마르크화는 전후 폐허에서 독일경제의 부상을 일으킨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로화 도입을 위해 마르크화를 포기하는 것은 큰 정치적 실험이었으며, 독일 내 여론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유로화의 도입은 경제적 편익을 고려하여 결정되었으나, 약세통화와의 통화통합이 독일 내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1992년 8월의 설문조사에서는 독일인의 20%가 단일통화의 도입에 찬성하는 반면에, 70%는 단일통화가 마르크화와 같은 강세통화가 되지는 못할 것으로 응답하였다. 경제학계의 반대로 이어져 1992년 7월에는 62명의 독일 저명 경제학자들이 단일통화 도입에 관한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독일중앙은행(Bundesbank)은 공식적으로는 유로화의 도입을 찬성하였으나, 경제통화동맹과 함께 정치통합 조치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단일통화 도입의 계획은 희석될 것이라고 경고의 성명서를 수차례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로화의 채택이 추진된 데에는 유로화의 도입이 거래비용의 감소와 함께 통화안정과 유럽 내의 독일의 입지강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근거에 있었다. 이러한 편익과 독일 내 반대움직임이 조합되어 유로화 도입을 위해서 재정, 물가, 금리, 환율 등 엄격한 수렴조건이 제시되었다. 또한 유로화 체제의 운영을 위해 추가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첫째, 새로 출범하게 될 ECB는 독일중앙은행의 운영원칙을 그대로 계승하여 물가안정을 유일한 임무로 부여받았다. 이는 프랑스, 이탈리아 등 재량적 통화정책의 전통이 있는 국가들의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통화가치와 물가안정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기 위한 조치였다. 둘째, ECB 뿐만 아니라 모든 유로존 회원국의 중앙은행은 재정의 통화화 조치가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매입하는 조치가 금지된 것인데, 이는 도덕적 해이 및 물가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되었다. 셋째,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로화 사용국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채무지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였다. 이른바 ‘지급불능조항(non bail-out clause)’으로 불리는 이 원칙은 과도한 재정지출로 인해 신용위기가 발생할 경우 당사국이 주변국의 신용에 기대는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렇듯 유로화의 도입은 유럽통합의 틀 속에서 공통의 이익이라는 전제하에 독일과 다른 국가들 간의 견해가 절충되면서 진행되었다. 독일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선택하는 대신에 독일연방은행의 특징을 유로존 운영체제에 각인시켜 넣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영국의 경우 전통적으로 유럽의 단일시장은 중시하되, 이를 뛰어넘는 과도한 유럽통합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유로화 출범이 가까워지자 영국의 유로존 가입여부가 논의되었으나, 영국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규정된 ‘선택적 탈퇴(opting-out) 조항을 활용, 독자적인 통화주권을 보유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유로화 도입의 성과
유로화는 찬반양론 속에서 도입되었으나, 도입초기 잠시의 불안을 벗고 글로벌 금융위기 진전까지 많은 성과를 나타내었다. 우선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단일통화의 사용에 따라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인 수준으로 수렴되었다. 과거 유로존 회원국 중에는 물가상승률이 20%를 상회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유로화 도입을 전후한 거시경제관리는 고물가의 근본원인을 차단하였다. 이로인해 장기인플레 기대심리가 낮게 나타나면서 금리 또한 저금리로 수렴하였다. 저금리로의 전환은 투자촉진과 고용창출로 이어져 거시경제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단일통화의 사용에 따른 환리스크의 해소, 거래비용의 감소 등으로 인해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이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1999년 평균 9% 수준이던 유로존의 실업률은 2008년에는 7%로 하락하였다. 물론 고용증가가 단순히 유로화 사용에 기인한다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유로화 도입을 계기로 형성된 안정적인 거시경제환경과 투자확대, 개혁조치들은 고용증가에 크게 기여하였다. 무역·투자 측면에서는 유로화 사용국 간의 무역과 투자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비유로화 사용국과의 무역과 투자 또한 증가하여 전반적인 무역확대가 이루어졌다. 금융측면에서는 유로존 내 금융시장의 통합이 심화되면서 과거와 달리 대외충격을 흡수, 관리할 수 있는 여력이 증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양호한 거시경제, 저금리, 저실업, 금융시장의 통합심화 등에 따라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 또한 제고되면서 외환거래시장과 채권시장,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액 등에서 달러화에 대비하여 비중이 증가하면서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에 경쟁하는 통화로까지 성장하기에 이른다.
유로화 도입의 부작용
이렇듯 유로화의 사용은 많은 성과를 가져왔으나, 성과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감춰져 있었다. 1998년 유로화 도입 직전에 155명의 독일 경제학자들은 파이낸셜 타임誌에 기고를 통해 유로화 도입을 늦출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유로화 도입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 궁극적인 이유는 단일화폐의 사용이 지나치게 큰 도약이기 때문이다. 각국 간의 거시경제적 차이를 정책조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형성된 이후에야 단일통합의 도입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유로화 도입의 반대 또는 유보논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1960년대 후반 독일이 주장한 ‘선수렴, 후통합’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유로존 회원국 간 정책조율이 미비한 상황에서 유로화의 도입은 ‘역내불균형’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유로존은 전체적으로는 경상·무역수지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경상수지 흑자국과 적자국 간의 이중구조가 고착되어 왔다.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북부유럽 국가들은 매년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는데 반해,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와 같은 남부유럽 국가들은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이중구조가 고착화된 근본적인 원인은 단일통화 사용으로 인한 환율조정 기능의 상실, 저금리로 인한 대외차입의 증가, 회원국 간 임금상승률 격차의 확대를 지적할 수 있다. 유로화 도입 저금리 차입이 가능해지면서 남부유럽 국가들의 해외차입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는 부동산 등 자산거품 현상을 유발하였다. 가령 2000년대 중반 스페인, 그리스 등 남부유럽 국가와 아일랜드의 경제성장률은 유로존 평균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였는데, 이러한 고도성장의 배경에는 해외차입의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 큰 폭의 부동산 가격 상승은 임금상승 압박을 가져와 남부유럽을 중심으로 실질실효환율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한 산업경쟁력의 약화는 경상수지 적자의 주원인이 되었다.
물론 경상수지 흑자확대로 축전된 잉여자본이 자본수요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유로존 내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자본이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이와 같은 역내불균형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통합을 통한 재원재분배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역내불균형의 확대는 잠재적인 위험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금융시장의 위험인식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자본이동이 멈추는 이른바 'sudden stop' 현상이 발생할 경우 유로존 체제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로벌 금융위기는 역내불균형에 대한 시장의 인식이 낙관적에서 비관적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로존의 취약성이 경제호황기에는 잠복해 있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다.
유럽재정위기에 대한 해법
2010년 초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으로 본격화된 유럽재정위기는 이후 아일랜드, 포르투갈로 확산되었으며, 유로존 3, 4위의 경제규모를 갖춘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위협하였다. 이후 유로존은 구제금융 기금의 설립, 재정준칙의 강화, 역내불균형에 대한 감시체제 정비 등 대응조치를 펼친바 있다. 특히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유로존 전반에서 진행된 재정긴축은 독일과 남부유럽 국가들 간의 미묘한 갈등 속에서 진행되었다.
유럽재정위기의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가장 우세한 시각은 유로화 도입에 따른 저금리 혜택이 각국의 거시경제정책과 조응하면서 공공과 민간 양 부분에서 부채가 급증했고, 이것이 재정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2009~10년을 전후하여 재정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는 세수감소와 대규모 경기부양, 은행파산에 따른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이다. 그러나 유로화 도입 이후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의 부채는 금리하락 추세에 맞춰 빠르게 증가하였는데, 이는 남유럽 국가들이 독일경제에 무임승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민간부분의 부채증가는 장기간에 걸친 산업경쟁력 악화, 차입을 통한 성장정책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단일통화의 사용은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한 수출경쟁력 조정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경쟁력 조정을 위해서는 임금 등 생산비용 절감, 생산성 향상 등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하는데, 남유럽 국가들은 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특히 해외차입의 확대와 자산버블은 임금상승을 불러일으켜 산업경쟁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다시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채무의 확대를 가져왔다. 민간부문이 채무를 감당할 수 없다면, 은행이 부실화될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정부가 이를 떠안게 되는데, 이러한 인식이 금융시장에 확산되면서 재정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재정위기의 원인을 공공과 민간 양 부문의 과도한 부채로 보는 시각은 독일 내 확산되어 있으며, 재정위기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반영되었다.
독일 경제: 유럽의 병자에서 유럽경제의 모델로
여기서 잠깐 글로벌 경제위기 이전의 독일경제 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독일경제는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독일은 통일의 후유증으로 1999~2001년의 호황기에도 10%에 가까운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였으며, 2005년 중 실업률은 12%에 달해 만성적인 고실업 국가로 분류된 바 있다. 특히 전체 실업자 중 74%가 12개월 이상의 장기실업자여서 경기적 요인보다는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같은 제도적 요인이 더 큰 문제였다. 독일 경제가 오늘날과 같은 경쟁력 있는 구조로 탈바꿈 한 데에는 사민당 주도의 정부(1998~2005년)에서 추진된 재정건전화, 노동시장의 합리화, 사회보장제도 개혁이 크게 주효하였다.
독일정부는 장기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실업제도를 근로유인형제도로 대폭 개혁하였다. 일명 하르츠(Hartz) 개혁으로 불리는 노동시장 개혁조치는 2003~2005년 슈뢰더(Schröder) 정부에서 시작되었고 메르켈(Merkel) 정부가 계승하였다. 1~4차에 의해 추진된 하르츠 개혁(I~IV) 중 장기실업자에 대한 조치는 하르츠 IV를 통하여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본 개혁은 크게 고용유연화 조치와 취업을 위한 정부지원강화, 실업급여의 수혜조건 강화를 골자로 하였다. 즉 고용관련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파트타임 고용의 확대를 촉진하고 실업급여의 제공을 매우 엄격하게 함으로써 장기실업의 동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독일의 단위노동비용은 유로화 도입 10년의 기간 동안 오히려 하락하였고, 이는 산업경쟁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같은 기간 남부유럽과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수출은 1999년 GDP의 25%에서 2011년에는 41%까지 증가하였고, 독일경제는 완연한 수출주도 경제로 탈바꿈 하였다.
중도좌파인 사민당 정부에서 시작된 노동개혁 조치는 정작 기민당(중도우파) 정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실업률은 EU 회원국 중에서 유일하게 2009~14년 중 꾸준히 하락하여 유럽 내 최저 실업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의 개혁조치는 독일여론이 남유럽의 재정위기에 매우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독일국민 입장에서 오늘날 자국 경제의 약진은 과거 고통감수의 대가인 것이다. 이 성과에 대해서는 극찬의 평가도 있으나, 비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가 불가능한 통화공동체에서 임금감소는 화폐의 평가절하와 같은 효과를 갖는다. 이른바 ‘내적 절하(internal devaluation)’로 지칭되는 이 조치는 강도 높은 구조개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실업을 주변국으로 수출’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위기해결을 향한 유로존의 정치동학
2000년대 중반 독일이 추진한 구조개혁을 면면히 살펴보면 재정위기에 대한 해결방안으로서 제시된 재정긴축 및 구조개혁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정위기의 원인을 공공부문의 재정통제 실패와 산업경쟁력 약화로 본다면, 유로화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정건전성 확보와 경상수지 적자억제가 필수적이다. 자국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 대외불균형을 조정할 수 없는 유로존 취약국의 입장에서는 결국 긴축과 노동비용 감소 등을 통해 대외차입 및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내적 절하과정은 소비·투자의 감소와 더불어 고실업 등 경기침체를 유발할 수밖에 없으며 구조개혁을 위한 고통이 수반된다. 2010년의 재정위기 이후 유로존이 재차 경기침체에 빠지고 디플레이션이 확산되는 것은 재정위기의 후유증인 동시에 구조개혁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간의 경기불안과 고실업은 경제영역을 넘어서 정치·사회적 불안을 여기하고 있다. 유럽 내 유럽회의주의 성향의 정당이나 국우정당이 득세하고 있는 점은 경기침체와 무관하지 않다. 장기간의 경기침체를 겪은 그리스의 경우 구제금융과 긴축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긴축에 반대하는 극좌파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 재정위기를 둘러싼 회원국 간의 입장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며, 올해의 경기전망 또한 밝지만은 않다. 지난 1월 보수적 통화정책으로 정평이 나 있는 유럽중앙은행이 대규모의 양적완화 조치를 발표한 것은 이와 같은 위기감을 반증한다 할 것이다.
EU/유로존은 전례없는 재정위기를 맞아 회원국 간의 이견에도 불구 힘겹게 제도적 개편과 구조개혁을 추진 중이다. 또한 작년 말 임기가 시작된 융커(Jean-Claude Juncker) EU 집행위원장은 유로존 취약국에 대한 대규모의 인프라 투자를 약속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FTA 추진에도 박차를 가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유로존은 매우 복잡한 정치동학의 기로에 놓여있으며, 이를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재도약과 후퇴를 결정할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3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