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21] [김성훈] 우리 헌법은 제11조 제1항 본문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며, 국민이 가지는 기본적 권리로서 ‘평등권’을 명시하고 있다. 평등권은 국민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권리, 즉 ‘천부인권’에 속한다. 국가가 이것을 제도화한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재차 확인하고, 국가의 운영과 제도를 마련함에 있어서 이를 기본 방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법의 사회권적 기본권 보장이 ‘진짜 공정’이다.
헌법 제2장(제10조부터 제39조까지 30개 조항)은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나열하고 있다. 그래서 제3장부터 이어지는 국가의 통치구조와 대비해서 제2장을 ‘기본권’장 또는 ‘권리장전’이라 칭한다. 기본권장에는 앞서 언급한 평등권을 포함해 행복추구권과 자유권 등의 ‘인간’ 본연의 권리를 재차 확인한 것,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국가 단위에서 정립한 ‘국민’의 권리가 망라되어 있다.
특히 국가 구성원으로서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 건강하고 쾌적한 생활, 약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 의무 등에 관한 규정은 인간의 자유권적 기본권을 제도로 구체화한 것으로서 이를 ‘사회권적 기본권’이라 칭한다. 사회권적 기본권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우리 헌법 제1조 제1항,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한”다는 헌법 전문의 내용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즉, 우리 헌법은 인간의 기본권 권리를 확인하고, 이를 제도화한 권리를 명시함으로써 국민 전체의 행복과 공생, 연대의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 제11조에 명시된 ‘평등권’은 이러한 헌법 전체의 정신과 맥락에 따라 해석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들, 특히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공평’ 또는 ‘공정’을 정치적 구호로 내세우면서 정작 그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헌법의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용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다. 정치는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활동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용어에 담긴 의미를 비틀어 왜곡하고, 결국 국민의 이해관계 조정은커녕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의 등장은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헌법이 천명하는 ‘평등권’의 개념을 난도질하여 자신의 차별화 전략으로 삼는 정치인들의 행보에 유감을 표하며, 우리 헌법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과 공정이 무엇인지 논하고자 한다.
사회권적 기본권에서 ‘차별’을 명시한 이유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은 “누구든지” “모든 국민은”과 같은 표현으로 헌법 전반에 녹아 있다. 이러한 개념을 해석하는 방식은 2가지가 있다. ‘똑같이’로 해석하는 방법과 ‘다르게’로 해석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평등을 ‘누구나 똑같이’로 해석하는 경우, 이것을 ‘형식적 평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르게’로 해석하는 경우, 이것을 ‘실질적 평등’이라고 한다. 흔히 ‘평등’이라는 말은 ‘누구든지 똑같이’로, 즉 형식적 평등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리고 이 지점은 나쁜 정치인들이 대중을 선동하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평등은 결코 형식적 평등이 아니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이 아니며, 헌법의 문언이나 헌법재판소의 결정 사례를 통해 이미 정립된 법리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를 초월한 인간의 자유권적 기본권은 국가 제도를 통해 사회권적 기본권으로 구체화된다. 사회권적 기본권의 내용은 평등의 개념을 해석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회권적 기본권이 우리나라 헌법 제34조에 규정되어 있고,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항 :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제2항 :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제3항 :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제4항 :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제5항 : 신체장애자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위의 규정에 따르면, 제1항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며 평등권을 천명하면서 그 구체적 방법으로 “여자의 복지와 권익 향상 노력”,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 노력”,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만약 평등을 형식적 평등으로 해석한다면 위 헌법 규정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모든 국민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노인, 청소년, 사회적 약자를 ‘특별히’ 더 챙기라고 명령(노력하여야, 의무를 진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는 특정 국민에 대한 특혜이며 나머지 국민에 대한 ‘차별’이다. 이러한 차별을 헌법 자체에서 명시하고, 나아가 국가의 의무로 명령하기에 이른다. 이는 헌법 제32조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고 하면서도 특히 여성과 연소자의 근로 및 국가유공자 유가족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호와 우선적 권리를 부여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나라 헌법의 ‘평등’은 바로 ‘형평(EQUITY)’이다!
이러한 경향은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제10차 헌법개정안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비록 정치권의 정쟁으로 국민투표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는 대한민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청사진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 노인,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임신·육아의 주체를 보호 대상으로 명시하고, 실업과 빈곤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서 적정한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제10차 헌법개정안 제35조, 제36조 등). 형식적 평등의 입장에서는 차별의 대상과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헌법이 말하는 ‘평등’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명백한 개념 정의를 내리고 있다.
“현법 제34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제5항은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여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고 있어, 결국 우리 헌법은 자유 시장 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국가 원리를 수용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하고 있다(헌법재판소 2001. 2. 22. 99헌마365 결정, 1998. 5. 28. 96헌가4 결정).”
즉,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 헌법이 지향하는 ‘평등’을 ‘실질적 평등’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는, 즉 합리적 차별이 평등의 본질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합리적 차별이란 인간다운 생활수준에 미달되는 사각지대에 있는 국민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신체적 능력 등 기타의 사유로 상대적으로 기회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며(헌법 전문), 전체 국민 생활의 안정과 적정한 소득분배를 추구(헌법 제119조 제2항)하는 것을 말한다.
‘똑같다’라는 의미의 평등은 영어로 “EQUALITY”이다. 반면에 ‘다른 것을 다르게’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는 “EQUITY”이다. EQUITY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형평’에 가깝다.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하여 전체적인 형평, 모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나라 헌법의 평등은 바로 ‘형평(EQUITY)’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 헌법·억강부약·공정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쯤에서 지금 정치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도가 표방하는 중심 가치는 ‘공정한 세상’이다. 한편, 이재명 경기지사는 ‘공정’을 자신의 고유 브랜드화 함으로써 정치적 지지를 얻어 왔다. 그런데 정작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경기도는 모든 도민에게 ‘똑같은’ 금액의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면서 이것을 공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해, 이재명 지사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전 국민에게 매월 일정한 금액을 기본소득으로 ‘똑같이’ 지급하겠다고 천명했다.
결국, 이재명 지사에게 ‘공정’ 또는 ‘평등’은 ‘똑같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헌법이 천명하는 평등에 반하는 해석이고, 이 지사 본인이 주창했던 ‘억강부약’의 정신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억강부약은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돕는다는 뜻이다. 억강부약은 우리나라의 헌법정신에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는 억강부약과 공정을 외치면서도 힘이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직업이 있든 없든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돈을 똑같이 나눠 주겠다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용어의 사용에 있다. 헌법에서 언급되고 있는 ‘누구든지’ 또는 ‘모든 국민은’이라는 용어는 ‘보편’이라는 용어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같은 원리로 ‘보편’이라는 용어도 ‘똑같이’가 아닌 것이다. 국가가 보호 의무를 지는 대상의 보편성이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국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누구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에서 말하는 ‘국민’은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을 말한다. “질병이 있는 국민은 누구나”에서 ‘국민’은 질병이 있는 국민을 말한다. “여성은 누구나”, “청소년은 누구나”,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학생이라면 누구나”, “형사피의자는 누구나”, “선거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는 누구나”, “종교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사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등등 헌법이 말하는 ‘누구나’는 사안에 따라 그 대상이 다양하다.
앞서 언급한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우리 헌법의 전문 및 개별 조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 우리나라 헌법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직업을 가질 것인지, 결혼을 할 것인지, 어디에 거주할 것인지 등에 대해 국가는 원칙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유를 누리는 과정에서 실패하거나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곤란을 겪거나 기타 신체적 문제나 나이와 성별 요인으로 인해 형평이 어긋나거나 정의롭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누구나’ 국가에 대해 보호를 청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득 수준, 직업 여부, 성별과 사회적 배경, 신체능력 등의 모든 요소와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심지어 당사자의 의사도 고려하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국가의 재정을 쪼개 나누는 것을 ‘보편’으로 포장하는 것은 개념과 용어를 비틀어 대중을 선동함으로써 사적인 정치적 욕망을 이루겠다는 의도 이외에는 달리 그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헌법정신, 그리고 기본소득 비판이 갖는 시대적 의미
중세시대의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일반인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중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성경을 오역해서 설교하기도 했다.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은 대중화될 수 있었고, 다양한 언어로 변역되고 전파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성직자를 거치지 않고도 직접 성경을 읽고 신과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헌법이 여기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한글로 쓰여 있고 문장을 해석하는 데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이를 읽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이나 헌법재판소 결정 사례 등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다. 더 이상 정치인을 통하지 않고도 헌법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주권을 표방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존재 가치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 헌법 제정 당시에는 아래로부터 국민의 합의로 헌법 초안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외국의 것을 들여온 것이다.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큰 옷이었다. 그래서 해석과 적용은 식자들이나 일부 정치인의 전유물이었고 국민은 피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국민의 주권의식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정보화 등의 사회 인프라가 확충됨에 따라 헌법은 비로소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에 더해 더 발전된 옷, 새로운 헌법을 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 헌법은 더 이상 일부 정치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로소 실질적인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수십 년간 국민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희생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나라, 질병이 발생해도 비용 때문에 병원에 가는 것을 주저하는 나라,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어려운 나라를 타개하려는 노력을 거쳐 비로소 보편적 복지국가의 길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많은 선각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투입되었다.
이러한 마당에 일부 정치인이 새삼 헌법정신에 반하는 기본소득론을 정치적 수사로 포장해 대중을 선동하는 작금의 정치 현실은 어렵게 일구어온 보편적 복지국가의 지향점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기본소득론을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 정치인에 대한 선호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헌법정신에 따라 운영되는 국가의 근간을 지키는 일이다.
헌법이 말하는 평등은 ‘실질적 평등’이다. 그리고 실질적 평등은 합리적 차별에서 나온다. 즉, 다른 것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우리 헌법이 말하는 평등의 본질이다. 이를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인이 없도록 국민이 헌법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 더 똑똑한 주권자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이코노미21]
[필자소개] 김성훈 변호사는 1972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였다. 벤처기업 운영 및 조선 기자재 제조업 근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해(사법연수원 38기) 대한변협 인권위원(의료 및 외국인 인권 소위)으로 인권보고서 집필에 참여하였고, 416온마음센터 법률고문, 안산정신보건심판위원, 안산시의사회 법제이사, 성남의료원 인사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법무법인 안산>의 대표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올해부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코노미21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제휴를 맺고 칼럼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본 글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