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한국 바둑책이 없어 영어로 책 발간해
KBS바둑왕전, MBC제왕전, EBS바둑교실 등 진행
대학원 졸업 후 2003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가 돼
[이코노미21 이재식]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에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바둑학과가 있다. 1997년에 설립돼 올해로 25년째를 맞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의 남치형 주임교수(이하 ‘남치형’)를 만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치형은 2년 전 프로기사직에서 공식 은퇴를 했다. 성적과 무관하게 의무적으로 바둑을 둬야 하는 것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제대로 활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지 않는데 자격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이었다고 했다.
자진해서 은퇴하는 프로기사는 거의 없지만(이세돌 9단과 11월17일 갑자기 은퇴를 발표한 박지연 6단 정도가 있다) 10년 전부터 해 오던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학교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한다. 2018년 바둑계에 있었던 큰 사건을 처리하고 나서 완전히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은퇴 2년 전에는 서른 살 무렵부터 맡았던 한국기원의 이사직도 사임했다. 한국기원의 이사직은 그냥 무던하면 되는 자리일 수도 있지만, 한국기원과 생각이 다른 부분을 성격상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바둑TV를 CJ로부터 인수하는 것도 한국기원과 판단이 달랐다. 한국기원과 바둑TV가 따로 있어야 서로 견제도 되고 민간방송과 경쟁도 된다고 생각했다. 96년에 시작해 20년 만에 흑자로 돌아선 바둑TV가 한국기원으로 통합되면서 시장의 파이가 줄어드는 것도 바둑계 전체로 보면 손해라는 생각도 했다,
남치형의 은퇴 당시 단위는 초단이다. 경력만으로도 그것보다는 높아야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승단대회 같은 것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당시 바둑계 상황이 여자프로기사가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다고 한다.
남치형은 입단 후 바둑보다는 방송과 해외보급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해외보급 활동은 실질적으로 혼자 도맡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90년대 중반쯤 외국에 가보면 한국 바둑책은 하나도 없고 전부 일본책이었다. 용어도 전부 일본어였고. 당시는 한국이 세계대회 우승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는 이창호나 좀 알까, 한국 바둑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한국 바둑과 문화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라며 자신이 영어로 쓴 바둑책을 보여 줬다.
남치형은 바둑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 바둑을 시작했다.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 춘강기원이라는 일종의 바둑교실이 생기자 아버지가 바둑 배우기를 권유했다. 서예가인 아버지는 바둑을 좋아해 남동생까지 바둑을 시켰지만, 남동생은 운동에 적성이 더 맞아 야구로 전향한 후 부상으로 그만두고 지금은 외무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치형과 동생은 공부를 곧잘 했는데, 아버지가 당시 부모님들과 달리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킬 생각이 별로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했다.
춘강기원의 원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프로기사였던 조영숙이었다. 당시 ‘대한기원’이었던 한국기원은 1975년 조영숙과 윤희율을 프로기사로 선발한 후 15년간 뽑지 않다가 1990 년에 다시 여자입단대회를 만들었다. 남치형은 이 대회가 생긴 첫해에 입단하게 된다.
남치형은 입단 전 바둑공부를 2년 정도 중단한 적이 있었다. 뭐든 목표가 있어야 되는데 아직 여자프로기사를 따로 뽑지 않았던 때라 남자들과 입단을 경쟁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요즘에야 여자바둑대회도 많고 상금이 큰 대회도 많으니 여자프로기사 지망생들이 적지 않지만, 당시는 입단을 한다고 해도 여자프로기사는 바둑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바둑 공부를 중단한 동안 권갑용 6단의 연구실(프로기사들이 모여서 연구와 친목을 다지는 공간)이 서울대 사거리에 생겼다. 이후 그 연구실은 국내 최대의 바둑도장으로 발전해 이세돌, 박정환, 최철한 등 당대 최고의 프로기사들을 배출하는 명문 ‘권갑용 도장’이 된다. 그 연구실에는 유창혁 9단을 포함한 많은 프로기사들이 드나들었다.
남치형을 알고 있던 권갑용이 조만간 한국기원에서 여자프로기사를 선발할 예정이니 바둑공부를 다시 시작하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결국 권갑용과 아버지의 설득으로 다시 바둑을 시작하게 됐고, 입단 영순위라는 말을 들었던 남치형은 전술했듯이 1990년 전승으로 무난히 입단하게 됐다. 명문 권갑용 도장 출신 1호 프로기사가 된 것이다.
꿈 많은 소녀시절에 다른 생각도 많았을 텐데 바둑공부를 하고 싶었냐고 물었더니 “그냥 당시 저는 말 잘 듣는 맏딸이었고, 아버지가 좋아하니 너무 싫지만 않으면 하려고 했다. 게다가 잘 두기까지 했으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는 바둑 공부를 계속 했지만 어느 순간 대학 진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2학년 2학기부터 준비해 1994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연애도 하고, 바둑TV도 개국을 해서 잦은 방송 출연으로 인해 바둑 공부가 여의치 않았다. 이후 KBS 바둑왕전, MBC 제왕전, EBS 바둑교실 등을 진행하면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방송에서 여자프로기사는 해설보다 캐스터 느낌이라 그것 역시 별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고, 대학 졸업 후 멋모르고 좋아 보여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처음 본 1차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평생 낙방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어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곧바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1년 정도 지날 무렵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한 문제 차이로 불합격했던 사법고시 1차 시험의 합격 통보를 다시 받게 된 것인데, 틀린 문제가 출제 오류로 판명돼 모두 정답으로 인정하는 덕에 생긴 일이었다. 2차 시험에 응시할 자격은 이후 2년까지 유지된다고 했지만, 남치형은 잠시 고민 끝에 2차 시험을 포기하고 대학원으로 돌아갔다. 법조인이라는 직업이 생각만큼 시간이 많고 여유로운 직업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자는 개인적으로 남치형이 검사나 판사를 했으면 정말 잘 어울렸을 거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후 2001년부터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에서 강의를 했고, 2003년 정식으로 교수가 된다. 바둑영어 수업이 있으니 강사로 와달라는 제안이 시작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대학에 인류학 전공으로 원서를 넣어 무난히 합격했지만, 영화전공으로 지원했던 현재의 남편이 불합격되는 바람에 유학은 포기하게 됐다. 남치형이 미국 유학을 갔다면 명지대학교 바둑학과교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다.
바둑학과에는 어떤 학생들이 지원할까? 정말 다양한 학생들이 다양한 경로로 지원한다고 했다. 당연히 기본은 바둑을 잘 둬야 하고 정시에서 실기를 통과하려면 아마5단 이상은 돼야 한다. 프로기사들에게 주어지는 특별선발 제도 같은 것도 있지만 프로기사라고 무조건 합격되는 건 아니다.
지난 25년 간 바둑학과를 거쳐 간 700여 명의 학생 중 유학생이 85명, 프로기사가 70명쯤 된다. 한국기원이 프로기사를 배출하는 사관학교라면, 바둑학과는 바둑계의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재들의 양성소다. 1997년에는 체육학부의 바둑지도전공으로 시작했는데, 육체활동 위주의 체육학부와 커리큘럼을 공유할 수 없어 1년 만에 분리하게 됐다. 모든 학과들은 학부가 있지만 바둑학과만 학과인 이유가 현재로서는 한 데 묶을 학부가 없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특별한 학과라는 반증일 수 있다.
바둑학과는 처음 30명을 선발했지만 내년부터는 21명을 선발한다. 학령인구 감소의 여파로 전국의 대학이 모두 일정 비율로 정원을 줄이라는 교육부의 방침에 의해서다. 남치형은 특이하게도 정원을 늘려달라고 학교당국에 요청하고 있다. 지원자가 많기 때문이다.
남녀 비율은 9대1 정도이고 어떤 해는 여학생이 1명만 입학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사회에서 바둑을 남성의 취미로 인식하기 때문일 거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바둑만 두던 아이들이라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남매, 자매, 형제 학생들이 많고 심지어 부녀 지간도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 나간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강하며, 바둑을 잘 두겠다고 입학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한다. 입학할 때 이미 상당한 기력을 가져야 하고, 프로기사가 되려면 18세 이전에 입단을 해야 하는 한국기원 입단규정도 영향을 준다고 했다.
현재 중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정원 외로 10명이 있다. 중국 대학에 바둑학과가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줄었지만 그 이전에는 한 해에도 10여 명이 지원했다. 유학생들은 한국어 자격시험 3급 이상을 통과해야 하니 입학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학생과 교수 공히 제일 큰 고민은 진로 문제다. 2007년까지는 온라인업체나 한국기원 등 유관기관과 단체, 방송국 등으로 취업이 잘 됐는데 이후에는 그때만큼 상황이 좋지는 않다. 2008년 발생한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영향이었겠지만, 아직 졸업생들이 적으니 끌어줄 선배가 많지 않은 것도 작용했을 거다. 프로기사가 된다는 것만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어서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학원 창업이나 방과 후 교사 등을 많이 생각한다. 요즘엔 유튜브와 방송 쪽을 희망하고 계획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남치형은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업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지난 1학기에 인공지능과 바둑에 대한 수업을 시작했더니 학생들이 힘들어해서 바꿔볼 생각이다. 바둑학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건 아니어서 핵심기술을 이해하고 AI가 미래의 바둑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방향을 검토하는 수업으로 바꾸려고 고민 중이란다.
남치형은 색깔이 매우 분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다. 미래계획을 물었더니 한참 후에 돌아온 답은 “조기은퇴하고 조용히 살고 싶다”였다. 남치형이 조기 은퇴 하기 전에 한국 바둑계의 미래가 발전적으로 정립되기를 기원한다. [이코노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