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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이동석 “차별 받던 사람이 다른 이를 차별하면 안돼”
재일교포 이동석 “차별 받던 사람이 다른 이를 차별하면 안돼”
  • 김창섭 기자
  • 승인 2023.02.28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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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등록증’은 일본인이 아님을 보여줘
재일교포 친구와 ‘조선문화연구회’ 만들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5년 수감생활
2015년 재심청구해 무죄 판결 받아
이동석
이동석

[이코노미21 김창섭] 이동석의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지금 국적만으로 그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는 없다.

재일교포는 식민지 이후 공식적으로 모두 일본국적이었다. 이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의 이전 국적을 회복하라는 결정이 이뤄졌다. 따라서 이때부터 재일교포는 조선국적을 갖게된다. 그러나 당시 북한을 지칭하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아닌 식민지 이전의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로 일본 정부가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자 재일교포가 일본 이외의 국적을 가질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그의 가족도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일본인 이름을 쓰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그는 일본인으로 살고 싶었고 가족들의 바람도 그랬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일본 효고현의 작은 마을에 살면서 ‘조센징’이라는 차별을 감수하며 살았기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오사카로 이사 오면서 그는 자기 신분을 숨기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남몰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집 책상 서랍에는 ‘외국인등록증’이 있었고 그는 항상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한편 일본 사회에서의 불투명한 전망은 현실적인 장벽이었다. 당시 재일교포는 공무원‧대기업의 취직이 불가능했다. 면접 등에서 국적이 밝혀지면 취업이 확정돼도 취소됐고 결혼을 위해 혼인신고를 할 때 국적이 공개되면 파혼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당시 재일교포는 흔한 말로 ‘빠찡코’나 ‘물장사’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래의 한 학생이 당당하게 한국 이름 말해 충격 받아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인생의 전환을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가족 몰래 조선학교를 견학했는데 그 곳에서 같은 나이의 한 학생이 당당하게 “난 한국사람이다”라며 한국 이름을 말한 것이다. 그는 부끄럼을 느끼고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같은 학교 재일교포 친구와 함께 한국인 이름과 국적을 밝히고 이를 학교 벽보에 공개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조선문화연구회’를 만들게 된다. 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으로의 대학진학을 결심했다.

1971년 만 19세의 나이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고 한다. 또 조국의 사람들은 그를 ‘반쪽바리’라고 멸시하기도 했다. 한국어 어학연수를 마치고 1973년 한국외국어대학에 입학하기 앞서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제정과 함께 계엄령으로 당시 한국은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생활이 재밌었다고 한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연극반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75년 어느날 ‘재한 재일교포 유학생 모임’에 참여하기 전 한 후배가 요새 재일교포가 잡혀가는 일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이동석은 “난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한 사실이 없고 학생 신분이라 걱정할 것 없다”고 답했다. 이후 모임에 가 보니 꼭 왔어야 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얼마 후 그의 하숙방에 보안사 요원들이 찾아왔다. 고문과 함께 간첩으로 몰린 그는 1975년 구속‧수감돼 5년 여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른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다.

이동석이 구속되기 얼마 전 월맹군에 의해 남베트남이 패망하며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됐다. 당시 가장 많은 병력을 주둔시켰던 한국군은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고 국민들에게 ‘공산화의 다음 타겟은 한국’이라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또 불안정한 정국에 간첩사건은 정권 안위에 필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동석은 대단히 낙천적인 사람이다. 기자가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감 생활을 어떻게 버텼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내가 이런 경험을 언제 하겠냐?”라며 적응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고문은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라는 영화에 출연한 이동석은 “고문은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고문을 당했냐고 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인간성이 말살됐던 모습에 대해 나는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 고통스러운 모습은 말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동석은 출소 후 일본으로 건너 가 결혼을 했고 두 명의 아들을 조선학교에 입학시켰다. 한국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재일교포는 모어(母語)와 모국어(母國語)가 다르다. 그에게 모국어는 한국말이지만 모어는 일본말이다. 그는 지금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지만 읽고 쓰는 것은 여전히 일본어가 편하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 속에서도 재일교포는 정체성을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 고민이 자식들 세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국이 지긋지긋 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결정를 내렸나?”라는 질문에 그는 “탄압 받는 일본 사회에서 정체성을 버리면 굴복하는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굴복하지 않은 그는 2015년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특유의 밝은 태도로 “저는 국가가 공인한 대로 간첩이 아닙니다”라고 얘기한다. 또 숙원이었던 한국외대 프랑스어학과를 2021년 졸업했다. 이후 그는 여전히 한국에 남아있다.

기자가 여전히 한국에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한국인로서의 책임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탄압을 당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피해자들의 모습에 눈 감아서는 안된다”며 “한국은 일본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요구한다. 자신의 피해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탄압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강조하지만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반성과 성찰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2021년 9월 21일 열린 ‘외국인보호소내 인권유린 규탄 및 재발방지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화성보호소에서 새우꺽기 고문을 당한 이주민의 호소문을 대독하고 있다.
2021년 9월 21일 열린 ‘외국인보호소내 인권유린 규탄 및 재발방지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화성보호소에서 새우꺽기 고문을 당한 이주민의 호소문을 대독하고 있다.

이동석은 아직도 간첩으로 몰렸던 재일교포들의 무죄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00여명의 구속자들 중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40여명 정도다. 정보에 취약한 사람들, 한국을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국정원 등 한국 정부의 비협조가 복합적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외국인보호소를 폐지하기 위한 모임인 IW31(International Waters31)와 함께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갇혀 있는 이주민을 지원하는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또 한국내에서의 활동과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를 통해해 고민의 확산을 바라고 있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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