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21 양영빈]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1974년에 맺었다고 알려져 있는 페트로달러(Petrodollar) 협정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수출 대가를 달러만으로 결제를 하고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적 지원과 고급무기 판매를 골자로 한다. 페트로달러 협정 기한은 지난 6월9일로 50년만에 종언을 고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페트로달러 협정은 아직까지 문서로 밝혀진 것은 없다. 호사가들이 지어낸 가공의 산물이며 기껏 해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신사협정’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때마침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브릭스(BRIC;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입했다는 소식은 미국달러 체제 붕괴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것으로 확대해석 됐으며 성급한 분석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국채를 더 이상 매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미국 달러가 더 이상 예전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먼저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국채의 양을 보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유한 미국국채는 2024년 3월 기준으로 1360억달러다. 현재 시중에 유통 가능한 국채 규모가 21조달러이므로 비율로 보면 전체의 0.65% 정도다. 페트로달러 협정이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이번 협정 종료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유한 미국국채를 전부 처분한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금액의 양이 터무니없이 작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보유한 미국국채를 시장에 던질 이유는 전혀 없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가 싼 가격으로 그 국채를 바로 매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2020년 3월 즉, 코로나 팬데믹 당시에 사우디아라비아는 600억달러 규모로 미국국채를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시에 상당수 많은 국가와 기관들이 달러 현금 확보를 위한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달러)현금 확보 전쟁(dash-for-cash)이 전세계적으로 벌어지자 연준이 급격하게 각종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과 QE로 막대한 규모의 국채를 사들였던 것이다.
위기가 발생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국채를 팔아 자국 통화인 리얄화로 바꾼 것이 아니라 달러 현금으로 바꾼 것뿐이다.
페트로달러 협정의 유무와 관계없이 50년 전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책 당국자들에게 달러(또는 미국국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가 급등과 이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무역흑자가 생기고 달러가 그대로 사우디아라비아로 유입되면 중앙은행은 달러를 리얄화로 바꾸게 된다. 그 결과 시중에 엄청난 규모로 리얄화가 풀리게 돼 인플레이션 압박을 가져온다. 만약 무역 흑자를 리얄화로 바로 바꿨다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는 매우 큰 인플레이션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국내 산업 기반이 성숙하지 못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생산적인 투자는 힘들었으며 대규모 무역 흑자가 가져올 부작용인 인플레이션 급등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안전자산인 미국국채에 투자하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상의 페트로달러 협정이 사우디아라비아로 하여금 미국국채에 투자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적 조건상 미국국채를 매입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던 것이다.
브릭스(BRICS) 체제는 현재의 달러 체제에 파열구를 낼 수 있을 것이가?
미중 무역전쟁, 러우전쟁 등으로 지정학적 불안정이 가중되고 미국은 전세계 결제 시스템의 핵심인 SWIFT를 통해 달러 결제를 제한하자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중심으로 BRICS를 결성해 독자적인 경제블럭으로 대응했다. BRICS 회원국은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주로 위안화)를 통해 회원국 사이의 무역 결제를 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위안화가 국제 무역 결제와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비율도 상승했다.
브릭스의 등장으로 현존하는 기축통화인 달러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기축통화의 등장을 점치곤 한다. 그러나 BRICS 회원국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풍부한 유동성, 개방성, 투명성을 골고루 갖춘 국채시장을 운용하고 있는 나라가 없다. 이것은 현재 늘어나고 있는 위안화 국제결제가 상품대금 결제 수준에서 한정돼 사용될 것을 암시한다.
다음은 BIS에서 3년마다 발간하는 보고서에 있는 주요 통화별 결제수단으로 사용된 금액의 비중을 보여준다.
중국 인민폐(RMB)는 2010년 이후 사용량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다른 통화에 비해서는 매우 미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국경을 뛰어넘는 거래는 무역거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투자(FDI), 포트폴리오투자 같은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가 있다. 국경을 넘어서는 거래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상대방 통화의 유동성, 개방성,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국채시장이다. 수백억 달러 규모에 해당하는 자금을 은행에만 맡길 수는 없기 때문에 단기국채에서 장기국채, MMF, 레포시장처럼 정교한 금융시장이 필요하다. 또한 이 모든 금융시장의 가장 기본은 국채시장이다.
중국은 당분간 국채시장을 개방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자본주의 경제에서 있었던 여러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을 성급한 금융시장 개방, 자유화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본격적인 인민폐 국제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신호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BRICS 체제 또한 아직은 큰 성공을 거두기는 힘들어 보인다.
아나스 알하지(Anas Alhajji) 에너지 전문가는 페트로 협정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협정 연장도 협정 폐기도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50년 만에 미국과의 페트로 협정을 연장하지 않았고 이것이 미국국채의 폭락으로 연결돼 시장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는 주장은 비관론자들이 만들어 낸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다. [이코노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