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순애 “노동자로서 농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코노미21 김창섭] 열개의 우물은 80년대를 경유하며 현재까지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빠져 있던 퍼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인천시 부평구에 소재한 십정동의 빈민운동 및 탁아운동 활동가들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있다. 열개의 우물이란 바로 이 ‘십정동(十井洞)’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동일방직 노동자였던 안순애의 이야기가 큰 축을 차지한다.
안순애는 살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는 엄마를 돕기 위해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나오고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그는 장시간 노동을 마치고도 엄마를 돕기 위해 굴껍질을 까야만 했다. 그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그러나 안순애는 살기 위해 공장에 들어갔지만 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동일방직은 70년대 노동조합 지부장 선거에서 여성이 당선되는 것이 확실해지자 회사관리자와 남성노동자들이 경찰과 짜고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투척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열악한 노동환경에 저항했다. 그러나 남성들과 경찰은 가혹한 응징으로 답했다.
경찰에 의해 처참해진 농성 현장에서 어린 안순애는 연행과정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흩어진 언니들의 신발과 옷가지를 주우며 공포와 분노로 울어야 했다.
어느새 노동투사가 되어버린 그는 해고노동자가 돼서도 쉼없이 싸워야 했고 안순애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의에 빠지게 된다. “민들레가 피어 있는 것을 보는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한 거야. 그런데 저 꽃은 왜 저기 피어있는 거야?”
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다고 느낀 그는 도망치듯 농민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나무와 산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서, 사람들이 싫어서 충북 음성에 온 그는 냉엄한 현실에 부딪힌다. “여태까지 노동자가 가장 힘든 줄 알았어.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농민들이 더 불쌍한 거야” 그는 결국 살기 위해 다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영화로 보는 세상’의 박수영은 DMZ영화제에 초청된 안순애에게 “영화 속에서 ‘그래도 과거보다는 지금이 나아지지 않았나?’라는 동료들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안순애는 “노동자로서 농민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이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한편 모두 맞벌이를 해야만 했던 공장지대 주변 빈민촌에서 아이들은 육아와 교육에서 소외됐다. 남편의 월급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당시 여성들은 파출부로 공장으로 또는 시장으로 품 팔러 나가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국가도 사회도 온전히 책임지지 않았다. 이때 대학생들이 이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당시 그곳에서 같이 활동한 김현숙은 “난 그때가 너무 행복했다”고 말한다. 십정동 빈민들은 서로 밥을 꾸어주고 아이들 생일에는 탁아소 선생님을 초청해 자신들이 먹어도 부족할 음식을 나누며 가난한 공동체를 유지했다.
‘살기 위해 투쟁했다’는 안순애와 ‘그때가 행복했다’는 탁아운동 활동가들의 회상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이 영화를 끌어간다.
그럼에도 영화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경쾌하게 풀어간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의 저자 브래디 미카코의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영화 속 여성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영화는 80년대와 현재의 우리 사회를 다른 각도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한때 운동권이었던 지금의 중장년 선배세대에게 이 영화는 성찰과 반성하는 기회로 다가온다. 영화는 질문한다. ‘80년대 학생운동활동가들이 떠난 현장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그때의 여성노동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이 영화는 과거를 조명하는 것을 넘어 지금도 진행 중인 암울한 현재의 모습 또한 보여준다. 농민들의 토지를 절대농지로 묶어놓고 농촌지역 산업단지 개발에 따라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의 농민수탈,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황량한 아파트가 잠식해 선주민들의 공동체가 무너져 가는 모습도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우리들 세상은 이전보다 나아졌는가, 나아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코노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