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프트웨어 회사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한글과 컴퓨터’ 둘의 만남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을 때만 ‘빤짝’했을 뿐 이제까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조선시대엔 ‘언문’으로 불렸고, 일제시대엔 마음대로 읽고 쓰지도 못했다.
그러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만나 다시 한번 시련을 겪었다.
영어권에서 만든 컴퓨터와 불협화음이 생긴 것이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보이게 하려면 한글카드(보드)가 있어야 했다.
한글카드 하면 먼저 하드웨어를 연상하겠지만 그것만으로 한글을 쓸 수는 없다.
한글을 처리해주는 소프트웨어가 붙어야 한다.
하드웨어 한글카드가 하는 일은 단지 화면에 보이는 문자 코드가 한글인지 영어인지를 가려내고, 한글이면 롬(ROM)에 저장된 한글 자형을 화면에 보여주는 것뿐이다.
키보드에서 한글을 입력받아 한글코드로 만들어주는 일은 소프트웨어가 맡았다.
한글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큰 기여…한글 운영체제 등장 후 퇴출 89년 4월 이런 한글과 컴퓨터의 관계를 개선하는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문자를 출력하는 것까지 소프트웨어 하나로 처리하는 제품이 나온 것이다.
바로 ‘한글도깨비’였다.
소프트웨어가 문자를 출력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자형 데이터 때문에 메모리를 많이 차지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카드형에 비해 가격이 싸고 사용자 취향에 맞는 자형을 골라 쓸 수 있어 인기를 끌었다.
한글도깨비는 컴퓨터 전문지인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소스코드를 공개했다.
소스코드 공개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일이었다.
한글도깨비를 개발한 최철룡은 그 잡지 기자이기도 했다.
한글도깨비가 선보이기 전까지 한글·한자 바이오스(기본 입출력 시스템)처럼 운영체제 수준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은 값비싼 행정전산망용 카드를 사서 덧붙여야 했다.
한글도깨비의 소스코드 공개는 90년대 한글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소스코드 공개 1년 만에 상업화 성공 그리고 마침내 90년 7월 상업용 버전이 등장했다.
한글도깨비가 IBM 호환 PC 사용자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자 최철룡은 한글도깨비의 머리글자를 따 ‘한도컴퓨터’라는 회사를 차렸다.
소스코드를 공개한 지 1년 만에 곧바로 상품이 나오자 사람들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소스코드가 공개돼 경쟁제품을 낳기도 했지만, 한글도깨비 인기를 따를 제품은 없었다.
한글도깨비에 그나마 대든 제품이라면 한메소프트의 ‘한메한글’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제품으로 한글을 처리하는 원리는 같았지만 상반되는 점도 많아 재미난 맞수로 통했다.
한글도깨비는 어셈블러로 만들었지만 한메한글은 C언어로 개발했다.
한자를 처리하는 방식도 한글도깨비는 폰트 카드를, 한메한글은 확장 메모리를 이용했다.
판매 방식도 달라 한글도깨비는 한도컴퓨터가 직접 팔았고 한메한글은 삼테크 같은 대형 유통점을 활용했다.
한글도깨비3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폰트 카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불법복제를 당연시하던 분위기였기에 처음부터 소프트웨어를 롬에 담은 하드웨어 형태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 문제가 생겼다.
용산전자상가에 카드 자체를 그대로 베낀 복제품이 나돈 것이다.
한도컴퓨터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주요 부품인 마스크롬은 일반 소프트웨어처럼 복사할 수 없고 주문생산만 가능한 것이어서 꼬리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조업체로 삼성전자가 걸려들었고 무단복제를 주문한 두 업체가 잡혔다.
이 사건은 굴지의 대기업이 연관됐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한글도깨비의 생명도 오래 가지 못했다.
소프트웨어가 윈도우 같은 그래픽 환경으로 발전하고 한글 운영체제가 나오면서 한글카드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아니 ‘당연히’ 사라져야 했다.
컴퓨터에서 한글 입출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시절 한글도깨비는 도깨비 같은 기적을 만들었지만, 오토캐드 한글까지 지원한 5.1 버전을 끝으로 수명을 다했다.
현재 한도컴퓨터는 자신을 괴롭힌 불법복제에 한풀이라도 하듯 불법복제 방지장치인 ‘메가락’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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