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부터 IMF 3년차 증후군을 경고하는 말은 많았다.
한국도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처럼 구제금융 3년 만에 다시 위기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구조조정의 고삐를 다시 죄고 경상수지 관리 대책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제기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지고 있는 위기감은 강도를 더해 경제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이 여파로 올해 초 1000포인트 고지를 넘었던 종합주가지수는 반토막이 나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지방행정부처를 순시하는 자리에서 경제가 어렵다는 점을 시인하고 경제난국에 대한 자성론을 제기했을 정도다.
과연 주식회사 한국호는 암초를 향해 치닫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최근 한국 경제에 악재가 겹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인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지나친 위기감이 불안심리를 부추겨 한국 경제를 진짜 위기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다.
예고된 악재는 악재가 아니듯 위기설을 계기로 그동안 미뤄왔던 구조조정을 확실히 마무리하면 IMF와 같은 위기는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코노미스트들의 지적이다.
위기설의 원인은 대외변수와 부실정책 국제유가는 고공비행을 거듭하는 반면 수출의 견인차인 반도체 가격은 급락해 경상수지 흑자기조가 위협받고 있다.
각종 경기선행지수가 하향곡선을 그리는 등 경기하강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감지되는데다 물가도 큰폭으로 오르면서 ‘경기 경착륙’(hard-crash)에 대한 우려감이 증폭되고 있다.
자금경색으로 돈이 돌지 않는 가운데 4분기(10∼12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18조원의 회사채는 금융시장의 ‘시한폭탄’으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대우차와 한보철강 매각 불발이란 돌출 악재가 겹치면서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외환위기 탈출의 양대 견인차였던 경기회복과 구조개혁이 암초에 부딪힌 셈이다.
경제운용의 사령탑인 재정경제부 고위 관료조차 “악재가 겹쳐 경제가 꼬인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위기설의 바탕에는 유가 급등과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 등 돌발적인 외생 변수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신감도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부가 경제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미봉책을 남발해 위기설을 부추겼다는 진단이다.
대우사태 처리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아끼기 위해 모든 손실을 금융기관들에 떠넘겼다.
부실을 떠앉은 투신과 종금사로부터 뭉칫돈들이 빠져나갔다.
주식시장이 침체하고 채권시장이 마비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돈이 몰리는 은행들을 종용해 10조원 규모의 채권전용 펀드를 조성하기로 하는 등 시장안정책을 쏟아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에 눌려 공적자금 조성 및 투입의 적기를 놓친 것도 그렇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전문가는 “구조조정 작업이 겉돌고 대증처방이 남발되면서 경제전반에 불확실성이 쌓이고 있다”며 “최근의 위기설은 시장이 느끼는 불안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말한다.
외환방어 능력은 크게 높아진 상태 국내외 불안요인으로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지만 단기간 내 외환위기로까지 비화될 정도의 위기상황은 아니다.
경상수지가 흑자행진을 지속하고 있고 단기외채 비중이 위험 수준에 달하지 않은데다 외환보유고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외화 유동성 측면에서만 본다면 지난 97년 말처럼 단기간에 외환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단기외채가 총외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3.6%로 96년 말의 57%를 밑돌고 있다.
가용 외환보유액도 900억달러를 넘어 세계 5위 수준에 이른다.
단기간에 유출될 수 있는 자금으로 국내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된 자금까지 감안하더라도 외환방어 능력은 크게 높아진 상태다.
현재의 외환보유고만으로도 지난번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해외 은행들의 뱅크런(bank-run, 예금인출 사태에 따른 도산) 현상은 막을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달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대거 내다 팔긴 했지만 한국 경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던 외국인들의 시각이 비관적으로 바뀌었다고 속단하긴 이르다.
“한국에 97년과 같은 제2의 경제위기가 올 것이란 전망은 넌센스”(토머스 번 무디스 한국담당 국가신용평가국장)라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경제위기설의 구조적인 요인은 한국 경제의 체질이 허약해 대내외 충격에 동요하기 쉽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든든한 외환보유고를 확보한 덕에 97년과 같은 외화유동성 위기에 대한 우려는 크지 않더라도, 위기의 근본원인에 대한 치유가 지연돼 위기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이었던 기업개선 작업(워크아웃)은 부실기업의 피난처로 전락해 폐기처분되고 말았다.
제조업체들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6.6%를 기록해 97년의 8.3%보다도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기업이 이러니 기업대출이 많은 금융기관의 사정도 좋을 리 없다.
100조원이 넘는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됐지만 금융권의 부실은 여전하다.
취약한 수출구조가 개선되지 않아 위기탈출구 역할을 해온 경상수지 흑자기조마저 위협받고 있다.
특히 금융불안은 위기설의 최대 진원지다.
그 저변엔 경제상황에 대한 불확실성과 정책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이승명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지난 97년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단초가 대외신인도 하락에 있었던 것처럼 당면한 경제난국의 원인은 불확실성 증대로 초래된 시장위험과 신뢰성 하락”이라고 진단한다.
신속한 구조조정으로 불안심리 잠재워야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을 없애는 유일한 해법은 신속한 구조조정이다.
한국 경제를 뒤덮고 있는 불확실성이 걷히지 않는다면 증시 침체가 장기화돼 실물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경기가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경제도 남미국가들처럼 급등 후 추락하는 ‘롤러코스터’(roller-coaster) 경제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금융 및 기업 부문의 건전성을 회복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외환위기 발생 요인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요즘 불거지고 있는 위기설을 ‘조기 경보신호’로 받아들여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게 이코노미스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당국은 우유부단한 정책결정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며 “한국 경제가 위기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신속한 구조조정과 정책의 신뢰회복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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