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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열전] 아낄 땐 아끼고 쓸 땐 쓰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상징
[기업인열전] 아낄 땐 아끼고 쓸 땐 쓰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상징
  • 박덕수/ 작가
  • 승인 2005.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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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아낌없이주었노라


유일한의청렴하고근검한생활을보여주는많은일화가있다.
그가운
데몇가지만살펴보자.

1962년제2한강교,그러니까지금의양화대교를건설할때의일이다.
유일한은다리의강북쪽진입로인합정동일대에800여평의땅을소유하고있었다.
평당30원을주고산땅이었는데,당시시세는1만4천원을호가하고있었다.
그런데서울시에서는4500원에수용하겠다는입장을밝혔다.
당연히인근주민들은반발했고,유일한같은유력기업인이서울시측과교섭에나서주기를원했다.
어느날회사의총무부장을통해이런사정을알게된유일한은두말없이서울시가제시한가격에토지를매각하라고지시했다.
보통사람들상식으로는1만4천원짜리를3분의1가격에파는셈이었지만,유일한에게는30원짜리를150배가넘는값에파는것이었다.
게다가시민의교통편익을위해공공기관이하는일이므로당연히협조해야한다는게그의생각이었다.




가족들과단란한시간을보내고있는유일한.젊은시절의그는가족들을위해어느정도호사를부리기도했으며,그것은열심히일해서부를쌓은그의정당한권리였다.



19년사용한만년필,고장나자수리맡겨


쉐퍼(Sheaffer)라는고급만년필이있다.
유일한이애용했다고한다.
어느날그가무척기분좋은표정을짓고있기에,사람들이이유를물었다.
19년을사용한만년필이고장이나서본사에수리를해달라고보냈더니,특별한고객이라며낡은만년필을기념으로보관하고새만년필을선물로보내줬다는답이었다.
하나의만년필을19년이나사용하고고장났다며수리를맡기는사람이나,그런고객을예우하는회사나모두대단
하다.


50년대어느날,미국출장을갔다돌아오는길이었다.
유일한은비행기에서내리자마자출영나온부하직원에게봉투를하나내밀었다.
어리둥절해하는직원에게유일한이우표가얼마나붙어있냐고물었다.
100환짜리가14장,모두1400환어치우표가붙어있었다.
다시유일한이우리나라에는1천환짜리우표가없냐고물었다.
1천환짜리우표1장에100환짜리4장이면될것을,무려9장의우표를낭비했다는질책이이어졌다.
그리고는손톱만한크기의우표라도아무생각없이낭비하지않도록직원들을교육시키라고당부했다고한다.


그는세상을떠날때에도생전에그랬던것처럼검소한모습이었다.
그의유언에따라값비싼수의대신평소에입던양복과신발을깨끗하게세탁하고손질해입었다.


이렇듯여러가지점에서유일한은유별난부자였다.
그러나세상의모든부자들에게성자가되라고강요할수는없을것이다.
우리사회에서노블리스오블리제의상징과도같은유일한도지독한자린고비처럼내핍생활만을한사람은아니다.
그의사후에여러가지이유로엄격한자기절제와근검절약의모습만부각된면이있다.
그러다보니유일한은위대하긴하지만평범한사람은가닿을수없는위치에동떨어져존재하는화석화된인물같은느낌이없지않다.
하지만유일한도자신이쌓은부를적절하게누릴줄알았으며,그것은그의정당한권리였다.


게일(JamesScarthGale,1863∼1937)이라는선교사가있다.
1891년부터한국에서선교활동을하다1927년에은퇴해고국인캐나다로돌아갔다.
지금의종로5가기독교회관뒤편에있는연동교회를창립하는등기독교계에많은공헌을했다.
또한최초로성경을한글로번역하고,역시최초의영한사전을편찬하는등우리나라의현대어문생활에도결정적인영향을끼친인물이다.
그는한국에서생활하면서연동교회인근에양옥벽돌집을짓고살았다.
현대식가옥이드물었던당시에그집은‘연지동양옥집’이라고불리며세인의선망의대상이되고있었다.
게일이은퇴하고떠난뒤,새로운집주인이누가될것인지가장안의화젯거리였던모양이다.
‘연지동언덕자욱한수림중에별턴디가튼벽돌집의새로운주인으로젊은부부가낫타낫스니’그주인공이바로유일한과부인호미리여사였다.
사대문안의번듯한기와집한채가1천원정도이던시절에1만원을주고장만한집이었다.
중국태생에코넬대의대출신의소아과의사로,식민지조선에아무런연고도없이남편만믿고따라온신혼의아내에게그정도의호사는베풀어줄수있었을것이다.



고급주택에살며골프즐기기도


부자들의생활을얘기하면서빼놓을수없는소재가골프다.
많이대중화됐다고는하지만,아직도골프는중산층이상에서나즐길수있는스포츠이다.
물론수십년전에는특권층의상징중에하나였다.
유일한은과연골프를쳤을까?지금의능동어린이대공원은원래조선의마지막황제인순종의부인순명황후의능이있던곳이었다.
그런데26년순종이승하한뒤순명황후의능을이전하여합장하면서,이곳을최초의18홀골프장으로조성하게됐다.
이런과정을거쳐29년‘경성골프구락부’가발족하게된다.
‘李王殿下이하조선총독부고관은물론서울안에잇는일류명사와지방에잇는대재벌과조선에거주하고잇는英米인은거지반멤버-로되어잇다’고당시의대표적인풍속잡지<삼천리>는소개하고있다.
입회비300원에60원의연회비와별도로매월20∼30원의회비를내야했다고한다.
당시쌀한가미니값은8원내외였다.
30년대에이‘구락부’멤버는416명이었는데,유일한역시그들중의하나였다.
그역시골프를즐겼던것만은분명한사실이다.


젊은시절에호사를부릴줄도알았던유일한은40년대일제에의해쫓기듯미국으로건너간뒤독립운동을하면서목숨을건특수군사훈련을경험하고,또한국전쟁을겪으면서뚜렷하게생활의변화를보인다.
아내와아이들은그대로미국에있으면서,혼자한국에서사실상별거에가까운생활을했다.
그의생활은종교인의수행에가까울정도로검소해졌다.


우리가살고있는자본주의시장경제사회에서돈을벌고쓰는것은지탄받을일이아니다.
법을지키면서부를키우고,상식의범위에서소비하는행위는오히려권장할일이다.
그러나아직도부자들에대한반감
이사라지기는커녕더욱커지고있는것은그들이법과상식의범위를벗어나고있기때문이아닐까?이런점에서아낄줄도알고,쓸줄도알았던진정한부자유일한으로부터오늘의부자들이배워야할부분이너무도많을것이다.


*다음호‘유일한식경제’를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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