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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흔들리는 한국금융- 선진금융으로 가는 길
[기획연재] 흔들리는 한국금융- 선진금융으로 가는 길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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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자산 처리 노하우 아시아 최고…금융 산업화 위한 법 제도 정비 서둘러야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많은 것을 해냈는지도 모른다.
4월2일부터 사흘간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역내 채권시장 발전 국제회의에서 참가자들의 화두 중 하나는 “한국은 어떻게 그것을 해냈는가”였다.
세계은행(WB) 콸리드 미르자 섹터매니저는 “한국이 채권의 신용 보강을 잘 이뤄낸 것은 한국의 사법제도가 안정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이라고 평가했고 아시아개발은행(ADB) 아자이 사가 투자 담당관은 “한국이 국제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 건 잘 조성된 @스왑 시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재무성 조사국 노비루 아다치 부장은 “한국 신용보증기금과 자산관리공사의 실적이 우수한데 다른 나라 채권의 보증이나 유동화에도 관심이 있느냐”면서 슬쩍 해외진출 의향을 묻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한국이 적어도 금융부문에선 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앞서가고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도 왜 우리 금융시장은 파도 속 가랑잎 신세일까? 요즘엔 금융시장에서 비롯한 진동이 실물경제까지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는 이 고된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까? 경제주체들이 보는 우리 앞의 상황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점쟁이 화법으로 말하자면 길은 있으나 멀고 험해 고생수가 훤한 길이요, 그나마 가지 않으면 죽으니 진퇴양난의 길이다.


금융감독위원회 김석동 감독정책1국장은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길이라고 말한다.
“한국처럼 작은 경제는 대외충격에 쉽게 망가진다.
길은 두가지다.
국내시장에 방파제를 높이고 낮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면서 사는 길과, 방파제를 없애고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 말레이시아는 앞의 길을 선택했고 우리는 뒤의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거센 외파 속에 살아남으려면 집중과 선택을 통해 시장 자체의 힘을 더 기르는 수밖에 없다.
” 우리가 말레이시아의 길을 택하지 못한 원인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이라크전 파병을 결정해야 했던 지정학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세계화 조류에 휩싸인 경제와 기업에 잠시 쉬어갈 틈이란 없다.
아직 구조조정이 미흡한 산업이라고 정부가 감싸고 돌아도 별 소용이 없다.
성장과 구조조정을 동시에 이루지 못한 기업, 산업은 외파와 경쟁에 밀려 바로 도태된다.
신한비엔피파리바투신운용 채권담당 펀드매니저 최석원 차장은 “지금 상황에서 구조조정이란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를 갈아끼우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젠 그런 능력이 있는 곳만 구조조정에 성공해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능력의 유무는 정부가 판단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업 퇴출 때 경제에 미치는 충격에 대해 완화장치를 해주는 것 정도일 것이다.




우리 금융시스템이 가장 시급하게 갈아끼울 ‘바퀴’는 지난 시리즈에서 지적한 바 있다.
과도한 가계부채와 뒤떨어지는 시장 기능 말이다.
부채가 많으면 시장 변화에 과도하게 민감해져 실물경제까지 위축된다.
자본시장의 정화 기능이 약하면 부실자산이 발생했을 때 소화를 시키기 못해 소화불량, 즉 시장 경색을 가져온다.
이 취약점이 개선되지 않으면 우리 금융은 국내외 경제에 변수가 나타날 때마다 과도하게 부풀고 과도하게 꺼지는 양상을 반복할 것이다.


두가지 문제를 푸는 키워드는 같다.
‘경제 성장 엔진을 찾아라.’ ‘장기자산 시장과 부실처리 시장을 육성하라.’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선임연구위원은 “실물 토대 없는 금융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대출 흐름은 담보 가치, 즉 기업가치와 자산가치에 연동되기 때문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양두용 연구위원은 “좋은 기업이 있어야 좋은 회사채가 나오고 그래야 투자자가 모인다”고 말한다.
결국 금융 발전의 관건은 기업과 산업의 성장에 있다는 이야기다.


은행도, 카드사도, 심지어 할부금융사도 더이상 여지가 없을만치 가계대출 시장을 확장시킨 상황에서 가계신용을 늘려줄 금융부문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소득 증가만이 가계의 대출 상환력을 높일 수 있다.
소득이 늘어나려면 임금이나 자산가치가 증가해야 한다.
부동산가, 주가, 채권 등 자산의 가치는 기업과 나라경제가 성장해야, 또 장기자산 시장이 육성되어야 꾸준히 커갈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엔 소비가 자산가치 변동에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자산가치가 떨어지면 부채가 많은 소비자는 얼른 허리띠를 조이고 소비 위축으로 기업의 투자가 줄면 일자리는 줄어든다.
이러다가 1930년대 초 미국 대공황을 불렀던 악순환이 시작되지 말란 법은 없다.
현재로선 수혈하면서 수술하는 방법밖엔 별 도리가 없다.
즉 경제성장을 통해 가계소득을 유지하면서 부채 감소를 유도하는 것이다.


부실자산 시장, @정크본드@ 시장은 산업이 다양하고 기업이 많은 경제 기반에서 성장한다.
그래야 @헤지펀드@들이 포트폴리오를 짤 수 있다.
신한비엔피파리바투신운용 최석원 차장은 “한국 시장은 산업 집중 리스크가 커 정크본드 시장이 크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카드사의 경우 거래되는 채권은 7개사의 것뿐이다.
게다가 카드채 규모는 전체 회사채 수준에 육박할 정도로 크다.
이런 상황에선 헤지펀드가 분산투자를 할 수가 없다.
국내 펀드가 해외투자를 병행한다면 또 모를까.

국내엔 고수익을 노리고 유동성 위험, 파산 위험을 감당할 만한 투자 주체도 많지 않다.
한국펀드평가 우재룡 대표는 국내 투자자들이 신용리스크가 낮은 상품만 선호해 자본시장이 이원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최대 투자자인 국민연기금은 안전투자를 이유로 신용등급이 최상급인 자산만 선호한다.
일반투자자는 원금보장형 상품 등 리스크가 아주 낮은 상품이나 코스닥 주식 등 리스크가 아주 높은 상품에 몰린다.
미국의 워런 버핏처럼 정크 등급 기업의 채권이나 주식에 집중 투자하는 큰손도 없다.




자산유동화 등 부실처리 노하우가 한국 금융의 강점

시장이 이렇게 빈약한데도 이번 APEC 국제회의 참가자들이 한국 금융시스템에 부러움을 나타내는 이유는 뭘까?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강점은 허점에서 생겨났다.
투자 리스크를 극도로 회피하는 시장에서 부실채권을 처리하려다 보니 선진적인 리스크 분산기법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한국채권연구원 오규택 원장은 우리나라가 금융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수출 가능한 상품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산관리공사나 은행, 투신사들이 부실채권을 정리하면서 @자산유동화증권(ABS)@ 기법이 크게 발달했다.
대우 사태로 회사채가 신용경색을 일으켰을 땐 신용보증기금, 기술신용보증기금이 @프라이머리 CBO@를 발행해 위기를 넘겼다.
중소기업이 신용경색으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땐 중소기업진흥공단이 프라이머리 CBO를 발행해 국내외에서 자금을 끌어왔다.


덕분에 한국 금융은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련된 자산유동화 시장을 가지게 됐다.
이번 APEC 역내 채권시장 발전 국제회의에서도 자산유동화 기법을 활용한 한국의 방안은 참가국들의 호평을 받았다.


일부 금융 전문가들은 여기에서 희망을 찾는다.
어차피 한국은 미국 같은 선진 금융시스템을 가지긴 힘들다.
국내 시장, 배후 시장 규모의 한계 때문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양두용 위원은 벤치마크 모델로 미국보다는 영국을 주목한다.
금융위기를 겪은 뒤 영국은 금융시스템을 쇄신해 은행 등 금융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내놓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창의적인 금융상품은 새로운 수요,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이런 금융혁신은 지금 같은 법 체제에선 불가능하다.
우리 법체계는 새로운 제도나 상품을 도입하려면 법으로 일일이 정해야 하는 포지티브 시스템이다.
금융시장이 발달한 미국, 영국의 법들은 “무엇은 하지 말라”고 정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이다.
금지된 것만 하지 않으면 되니 미국, 영국에선 수많은 금융기법, 상품이 나와 시장의 검증 속에 진화하고 있다.


법 체제 정비는 정부와 국회의 몫이다.
여기에 북한과 중국을 잇는 배후시장까지 열어주면 한국 금융의 성장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방파제’ 없는 시장에서도 정부가 할 일은 많다.






용어설명

스왑(swap) 시장 상품의 고정가격과 변동가격을 교환하는 거래시장. 금리, 채권, 채무, 통화 등 현재 가지고 있는 상품을 원하는 조건의 다른 상품으로 교체할 수 있다.

정크본드(junk bond) 직역하면 쓰레기 같은 채권이지만 통상 고수익채권이라고 불린다.
신용도가 낮은 회사가 발행한 채권으로 원리금 상환에 대한 불이행 위험이 큰 만큼 이자가 높기 때문에 중요한 투자대상이 된다.

헤지펀드(Hedge Fund) 국제증권이나 외환시장에 투자해 단기이익을 올리는 민간 투자기금. 100명 미만의 투자가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자금을 모아 카리브해의 버뮤다제도와 같은 조세회피 지역에 거점을 설치하고 자금을 운영하는 투자신탁이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그룹이 가장 유명하다.

자산유동화증권(Asset Backed Securities) 유동화 중개기관이 자산을 원보유자(자산소유자)로부터 떼어내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를 거쳐 증권화해 시중에 유통시키는 것을 말한다.
원보유자의 파산 위험에 대비해 담보를 안전장치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보유자의 것보다 높은 신용등급으로 거래된다.

프라이머리 CBO(primary collateralized bond obligation) 신용등급 B~BBB 회사채를 증권사가 먼저 총액 인수하여 이를 유동화 전문회사(SPC)에 매각하고 유동화 전문회사가 이를 기초로 발행하는 채권담보부증권(CBO). 신용등급이 낮아 개별 기업이 자체적으로 회사채 발행이 어려울 때 공동으로 위험을 부담해 자금을 조달하는 금융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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