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progress)는 과연 우리를 장밋빛 미래로 데려갈 것인가? 우파의 재부상 속에서 좌파가 품어온 오랜 전제들은 무너지고 있다.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며, 좀 더 나은 형태의 복지국가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대체하리라는 전제 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시는 《진보의 착각》을 통해 이 시대 지식인들이 길 잃은 ‘진보’를 향한 맹목적인 낙관주의와 오해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20세기 이후 좌파와 우파는 생산물의 분배를 두고 극심한 이념적 갈등을 낳았지만, 양자 모두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긍정했고 대량생산을 통한 생활수준의 향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방종한 생활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우파와 마찬가지로 서구 수준의 생활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려고 했던 좌파의 기획 역시 결과적으로 환경재앙과 빈부격차의 심화, 전 세계적 폭동과 테러, 기후변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진보의 착각》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천국은 없음을 인정하고 무너진 사회적·문화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지금 진보 진영에 필요한 것은 이념적 순결성, 극단적인 냉소주의이나 낙관주의가 아니라 노동의 즐거움, 안정된 관계, 가정생활, 향토애, 역사적 귀속감 등 무너진 정신적 가치를 재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역사학·정치학·사회학에서 다뤄온 진보 개념을 점검하고, 좌파라는 이념적 경계 너머에 우리가 간과하고 오독하고 있는 공화주의와 기독교 전통 등, 다양한 이론과 가치관을 재조명하고 있다. 19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보에 관한 논쟁을 이끌어온 주요 비평가들과 그 사상적 배경을 다양한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이 시대의 진보가 나아가야 할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 등의 이념 논쟁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심리적·문화적·정신적 기초의 와해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것의 귀환이라고 말한다. 1970년대까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저자는 미국 사회가 정당한 권위의 붕괴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제도권은 신뢰를 잃고 노동은 가치를 잃으며 투표는 행사치레가 되고 병역은 피해야 할 것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리고 이처럼 사회적으로 팽배한 냉소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념적 무장이 아니라 욕망의 절제와 한계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인생의 어둠과 비참함을 알면서도 자립과 책임, 검약과 절제를 중시하는 미국 중하류층의 특성을 일컫는 서민주의(populism)를 주창한다. 서민주의는 한 뼘의 땅, 작은 가게, 쓸모 있는 천직 등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기술, 즉 보편적 가산 소유를 중시하며 한계로 점철된 인생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작은 영웅들의 삶을 말한다. 이 개념은 19세기의 노동운동에서 착안한 것으로, 저자는 당시 “생산하는 계급들”의 단결을 염두에 두고 협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생산을 다시 장악하려 했던 서민당, 즉 생산자주의의 다양한 시도들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진보의 착각」
(원제)The True and Only Heaven-Progress and Its Critics
(크리스토퍼 래시 Christopher Lasch 지음 / 이희재 옮김 / 휴머니스트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