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
동양에도 역사가 있었을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매우 어리석은 질문처럼 들리지만, 20세기 동양의 역사가들은 이 질문에 “예”라 답하는 데 힘들어 했다. 동양의 미래의 역사를 동양의 과거의 역사 속에 내재된 진보의 연속성에서 논하지 못하고, 이미 우월성이 입증된 서양의 수용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동양의 역사가가 자신의 역사에 대해 이와 같은 주저함을 보이게 된 역사적 계기는 19세기 유럽의 산업화였다. 이 때 세계는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시대에 접어든다. 서양은 부국에 편입되었고, 동양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빈국에 편입되었다. 그 이래 동서양의 역사가들은 대분기를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으로 본 동서양 비교문명사를 서술하였다.
21세기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대분기 시대에 형성된 서양=부국, 동양=빈국이라는 구조는 일과적(一過的)인 것이었다. 이제 다시 동양이 서양을 능가하는 시대가 출현할 것이다. 물론 동양은 과거에도 서양을 능가한 바 있다. 따라서 21세기 동양의 성장은 아시아의 재림이라 이름 붙여졌다. 현재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대분기 논쟁이 한창이다. 대분기는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역사의 에피소드였을 뿐이므로, 대분기를 역사의 종언으로 본 동서양의 비교문명 발전사는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대분기 논쟁이 한창인 이유이다.
동서양의 비교문명 발전사는 어떻게 새롭게 쓰여질 것인가? 분명한 것은 동양의 역사 발전에 내재된 진보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것에 보다 초점을 맞춘 역사가 쓰여질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이와 같은 작업을 하기에 자료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다. 중국 고대 기축시대의 사상가들의 저작들이 폭넓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은 후대의 사상적 저작들도 폭넓게 남아 있어 문명적 사유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기축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맹자와 명청 교체기의 대사상가였던 황종희를 비교하면 어떨까? 두 사상가의 문명적 사유의 변화 속에 담긴 역사적 진보, 이것이 이번 호의 주제이다.
맹자와 황종희 (1): 역사의 순환변동에 대하여
맹자는 한번은 다스려지고 한번은 어지러워진다(一治一亂)고 보았다. 요순의 시대가 다스려진 시대이고, 주왕(紂王)의 시대가 크게 어지러워진 시대이며, 주공(周公)의 시대가 크게 다스려진 시대이며, 공자 이전이 크게 어지러워진 시대이며, 공자가 <춘추>를 지음에 다시 다스려진 시대가 되었으며, 이후 다시 어지러워진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제 다시 다스려지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맹자가 다시 다스려지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번은 다스려지고 한번은 어지러워진다(一治一亂)는 역사적 순환변동에 대한 믿음도 작용하였지만, 인정(仁政)을 베푸는 군주가 천하를 통일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시대라는 인식도 작용하고 있었다. <맹자>의 “양혜왕 상”을 보자.
“이제 왕께서 훌륭한 정치를 하고 어진 마음을 베푸신다면, 천하의 벼슬하는 자들을 모두 왕의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게 하며, 농사짓는 사람들을 모두 왕의 들에서 농사짓고 싶게 하며, 장사꾼들을 모두 왕의 시장에서 물건을 쌓아두고 장사하고 싶게 하며, 여행하는 자들을 모두 왕의 나라의 길을 통해 나가고 싶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자기 군주를 원망하는 모든 백성들이 모두 왕에게 달려와 하소연하고 싶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맹자>, “양혜왕 상” 제7장 46면)
군주들이 천하통일을 다투는데, 그 승자를 결정하는 것은 백성들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움직임으로서 나타나는 ‘발에 의한 투표’이다. 발에 의한 투표가 이루어진다면 인정(仁政)을 베푸는 군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맹자는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새 왕조는 인정을 베푸는 자가 아니라 위세로 세상을 겁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열기도 하였다. 황종희의 <맹자사설>을 보자.
“소씨는 “한의 고조, 동한의 광무, 당의 태종, 송의 태조, 이 네 임금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옳다. 그러나 뒤의 원나라와 명나라의 개창자들은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천하가 위세에 위협을 받아 역시 하나로 통일되었다. [원나라와 명나라는] 진나라, 수나라와 다르지 않았는데도 오래도록 대를 이었다. 이에 이르러 천도가 일변하니, 부득불 ‘역취순수’(逆取順守)설이 있게 되었다.”(<맹자사설>, 54면)
황종희는 맹자와는 달리 일치일란을 믿지 않았다. <명이대방록>의 첫머리는 “나는 항상 맹자의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해 진다”(一治一亂)고 한 말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어찌하여 삼대(三代) 이후에는 혼란만 있었고 다스려지지는 않았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한다. 왜 삼대 이후에는 난세만 있고 치세는 없게 된 것일까? 그 실마리는 <명이대방록>의 “법제론”에서 찾을 수 있다.
“삼대의 법은 천하의 재부를 천하 인민의 수중에 두는 것이었다. 국토에서 나오는 이익을 반드시 다 취하지 않았고, 상주고 벌주는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법을 소략하게 하면 할수록 혼란은 더욱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이른바 무법의 법이다. 후세의 법은 천하의 재부를 자기의 광주리에 담아두는 것이다. 이익이 아랫사람에게 남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복은 반드시 군주가 거두기를 바란다. 한 사람을 쓰면 그 사람이 사사로이 이익을 취할 것을 의심하고, 또 한 사람을 채용하면 그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것을 억제한다. 한 가지 일을 하면 속지 않을까를 염려하고, 또 한 가지 일을 만들어서 속는 것을 방지한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광주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으니, 군주 자신도 또한 무서워 벌벌 떨며 날마다 오로지 광주리만을 걱정하기 때문에 그 법은 정밀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이 정밀하면 정밀할수록 천하의 혼란은 법 속에서 생기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비법의 법이다.”(<명이대방록>,“법제론” 67면)
삼대의 시대는 인민의 재부를 늘리는 무법의 법의 시대였는데, 삼대 이후에는 인민의 재부를 약취하고, 그 약취한 재부를 혹여 빼앗길까 두려워 이중 삼중으로 감시의 체계를 만든 비법의 법의 시대가 된 것이다. 삼대 이후의 난세는 ‘제도화된 난세’인 셈이다. 따라서 새로 도래할 치세는 ‘제도화된 치세’일 수밖에 없다. ‘제도화된 치세’는 발에 의한 투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제국(帝國)의 시대에 접어든 중국에서는 발에 의한 투표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맹자와는 다른 치세를 준비하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맹자와 황종희 (2): 치란의 기준에 대하여
역사 발전을 평가하는 핵심적 개념이 치세와 난세이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해 두자. 맹자는 치세를 인정이 베풀어지는 시대로, 난세를 그렇지 않은 시대로 구분하는데, 인정이 베풀어지는 시대는 나라가 흥하고 보존되는 시대이고, 그렇지 않은 시대는 나라가 망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치세와 난세는 국가의 흥망과 결합된다. <맹자>의 “이루 상”을 보자.
“하·은·주 삼대가 천하를 얻은 것은 어질었기 때문이고, 삼대가 천하를 잃어버린 것은 어질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기울고 흥하며 보존되고 망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천자가 어질지 못하면 천하를 보전할 수 없고 제후가 어질지 못하면 사직을 보존할 수 없으며, 경과 대부가 어질지 못하면 종묘를 보존할 수 없고 선비와 서민이 어질지 못하면 한 몸을 보존할 수가 없다.”(<맹자>, “이루 상” 제3장 171면)
반면, 황종희는 치란의 기준을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萬民之憂樂)으로 보았다. 국가가 흥하지만, 만민이 근심스러운 상태에 있으면 난세인 것이며, 국가가 망하지만, 만민이 즐거운 상태에 있으면 치세인 것이다. <명이대방록>의 ‘신하론’을 보자.
“대개 천하의 치란은 일성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에 있다. 그래서 걸주가 멸망한 것은 곧 치세(治世)가 되는 까닭이며, 진나라와 몽고가 일어난 것은 난세(亂世)가 되는 까닭이다. 진·송·제·양의 흥망은 치란과 관계가 없다.”(<명이대방록>, “신하론” 60면)
황종희는 제도화된 난세도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의 흥망을 치세와 난세의 지표로 볼 수는 없었다. 치세와 난세를 판정할 다른 지표가 필요하였는데, 만인의 근심과 즐거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치난의 기준을 만민의 근심과 즐거움(萬民之憂樂)으로 보는 것은 단순한 지표의 교체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국가의 통치이념을 공리주의(功利主義)에 기초하여 재구축하도록 만들었다.
맹자와 황종희 (3): 사회계약론적 구도에 대하여
맹자의 국가론은 공리주의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맹자의 국가론을 밑받침하고 있는 것은 성인의 정치였다. 성인은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물을 개발한다. 그리고 백성은 선정을 베푸는 국가를 찾아 유동한다. 맹자의 국가가 이와 같은 성인의 정치에 기초해 있음은 <<맹자>>의 “등문공 상”이 잘 보여준다.
“요임금 시대에는 천하가 편안하지 못했다. 큰 물이 멋대로 흘러 천하에 범람하고 초목이 무성하고 금수가 번식하며 오곡이 여물지 못하고, 금수가 사람에게 달려들며 짐승과 새 발자국이 나라 한 가운데에 어지럽게 나 있었다. 요임금 한 사람만이 이것을 근심하여 순을 기용해 다스리게 했다….그렇게 한 후에야 나라의 가운데가 농사를 지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 후직이 백성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치고 오곡을 기르게 하자, 오곡이 익었고 백성들은 그것을 배불리 먹고 자신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백성들이란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으며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다면 금수에 가까워진다. 성인은 이것을 근심하여 설(契)을 교육을 관장하는 사도로 삼아서 인륜을 가르치게 했으니,…, 방훈께서 ‘백성들을 격려하고 따라 오게 하며, 바로잡아 주고 곧게 펴주며, 도와주고 거들어 주어서 스스로 선한 본성을 깨닫게 하고, 또 그들에게 은덕을 베풀어 주어라’고 했다.”(<맹자>, “등문공 상” 제4장 137-138면)
반면 황종희에 있어 백성은 더 이상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국가의 부재 속에서도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로 설정되었는데,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자사 자리(自私自利)였다. <명이대방록>의 “군주론”을 보자.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각기 자사와 자리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천하에 공공의 이익이 있어도 누구도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공공을 해치는 일이 있어도 누구도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자기 개인의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이익을 받게 하며,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해로 여기지 않고 천하로 하여금 그 해를 풀게 하였다. …”(<명이대방록>, “군주론” 49-50면)
백성이 자사 자리를 도모할 수 있는 문명의 주체가 되게 되면, 국가는 문명의 근원이 아니라 공공재와 관련된 무임승차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로 축소된다. 반면, 국가는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취약하게 함으로써 백성의 재산을 약취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가능성을 차단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 보다 중요하게 된다.
맹자와 황종희 (4): 토지제도 및 수취제도에 대하여
국가의 이념 및 현실적 존재 양태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토지제도 및 수취제도의 구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맹자는 백성이 경작하며 먹고 살 수 있는 경지를 국가가 개간하여 제공하는 것을 국가의 기간적 역할로 생각하였는데, 이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정전제(井田制)로 보았다. 정전제는 토지분여제도이자 동시에 수취제도이기도 하였는데, 그 수취분은 군자를 먹여살리기 위한 재원으로 사용될 터였다. <맹자>의 “등문공 상”을 보자.
“사방 각 일리의 토지가 한 단위의 정(井)이고 각 정의 넓이는 구백무인데, 그 정의 중앙을 공전(公田)으로 합니다. 여덟 가구가 각각 그 주위에 있는 백무의 땅을 사전(私田)으로 가지며 공전을 여덟 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합니다. 공전의 농사일을 끝낸 후에 사전의 농사일을 하는 데, 이것은 야인을 군자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오.”(<맹자>, “등문공 상” 제3장 132-133면)
반면, 황종희는 국가적 경지개발체제는 상앙의 변법 이래 폐기되고, 대신 백성의 경지개발체계가 전개되었으며, 국가는 백성의 소유지에 백성이 감당할 수 없는 조세를 부과하여 백성의 항산의 체계를 파괴하는 존재로 변화하였다고 보았다. 황종희의 <맹자사설>을 보자.
“옛날의 농지는 위로부터 받고 세는 10분의 1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농지는 백성이 스스로 소유하는데도 세는 절반에 이르니, 백성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진(秦)이 경계를 새로 해서 정전이 모두 폐기되었으니, 이것이 일변(一變)이다. 진 이후 당(唐)에 이르기까지 백성에게 취한 것은 곡식과 비단이었을 뿐인데, 양염(楊炎)이 양세법을 시행하고 비로소 고쳐 전(錢)을 징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또한 일변이다. 명(明) 이래 전을 폐하고 은을 징수했으니 구하는 것 [즉 은]이 소출된 것이 아니었다. 황하 이북에서는 풍년이 들어도 곡식의 가치가 낮아 백성은 구렁텅이에 빠졌으니 이것이 또한 일변이다. 이 세 번의 변화를 거쳐 민생은 거의 희망이 없어졌다.” (<맹자사설>, 182-183면)
황종희에게 중요한 문제는 국가적 경지개발체계로서의 정전제를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개발한 경지에 중과세하는 수취체계를 폐기함으로써 자사 자리에 기반한 항산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수취체계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필요했다. 황종희가 정전제의 부활을 논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당시 중국에는 관전(官田)과 민전(民田)의 구분이 엄연하였는데, 황종희는 관전을 정전제에 따라 운영하도록 제안한다. 이것은 관전에 대한 국가의 수취율을 1/10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의미하며, 관전이 아닌 민전에 대한 수취를 부당한 것으로 또는 1/10보다 훨씬 낮은 국가의 수취율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 관전에서의 정전제 부활은 국가적 수취체계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다시, 동양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명이대방록>은 표면적으로는 중국에서 전개된 역사의 퇴보를 보여주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개혁의 방안들은 중국의 역사가 담고 있는 진보적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에서 공리주의적 인간은 이미 기축시대에 출현하였지만, 그들은 정치적 주체로 호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종희에 있어 공리주의적 인간은 자사 자리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군주가 참칭하는 공(公)을 대사(大私)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이익의 합을 더 크게 하는 공공적 질서를 공(公)이라 규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 형성자로 위치지워져 있다.
물론, 이 공리주의적 인간들이 형성하는 공(公)적 질서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적 질서는 유교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의 시비 판단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된다. 그러나 양자가 크게 괴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소양은 이제 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소양의 대중화, 바로 그것이 ‘공리주의적 인간의 정치적 주체로의 호명’과 ‘유교적 소양에 의한 시비판단’을 국가 개혁 구상의 두 축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역사적 배경이었다. 맹자와 황종희,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갈라놓은 것은 유교적 공정사회의 형성 및 발전이었다 할 수 있는데, 황종희의 시대에 유교적 공정사회는 아직 만개하지 않았다. 그것이 꽃 피우기 위해서 중국은 더 진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직은 난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