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
서(序): 왜 동서양 고전인가? (1)
본 연제도 어느 덧 동양 편을 끝내고 서양 편으로 들어섰지만, 돌이켜보니 서두 없이 시작되었다. 왜 경제학자가 동서양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동서양 고전을 경제사상사의 시점에서 읽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살펴볼 고전들은 어떻게 선정되었으며, 이와 같은 고전을 함께 읽음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등. 연제에 앞서 밝혀 두어야 할 다양한 내용들이 있었지만, 적어두지 않았다.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서두에서 했음직한 논의로 돌아가 보자.
왜 경제학자들도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경제학은 합리적 경제인의 모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의 다양한 연구에 의하면, 현실의 인간의 행위는 합리적 경제인의 모형으로부터 예측되는 행위들과 다를 때도 많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에 직면하면,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현실에서 관측되는 행위는 왜 합리적 경제인의 모형에서 예측된 것과 다른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때로는 어느 쪽이 더 현명한가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합리적인 경제인과 현실의 인간 중 누가 더 현명한가?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현실의 인간은 정보의 제약, 정보 처리능력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한정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합리적 경제인이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일부 경제학자 예컨대 아마티아 센과 같은 경제학자는 현실의 인간이 합리적 경제인보다 더 현명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누구의 견해가 맞을까? 문제를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만들면, 답을 찾기가 용이해 진다. 이제 문제를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보자.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의 현인은 합리적 경제인보다 더 현명한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은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현명한가? 나는 이 두 질문에 대해 모두 예라 답할 것이다.
고대 시대의 현인인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학 교과서 속의 합리적 경제인보다 현명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으로서의 우리는 고대 시대의 현인인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현명하다.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고대의 현인인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현대의 문명인인 우리는 인간이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자신들이 속한 문명에서는 어떻게 해결해야 현명한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현명한 해법에 대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문명 속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고대의 현인들과 우리들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 교과서 상의 합리적 경제인은 어떨까? 그는 인간이 직면하는 문제들 예컨대 무한 반복게임의 형태를 취하는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해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중 하나의 해법을 선택해서 그에 부합하는 우아한 제도적 체계를 만들고, 그에 익숙한 인간들의 삶을 구현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이론상으로 가능한 다양한 선택지 앞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아한 제도적 체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현명한 삶을 익숙하게 사는 것은 문명인으로서의 인간이지 경제학 교과서 상의 합리적 경제인이 아니다.
현대의 인간이 경제학 교과서 상의 합리적 경제인이나 고대의 현인인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현명한 이유는 현대인은 보다 성숙한 문명 속에 살고 있으며, 그에 걸맞는 삶을 더 익숙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학 교과서 상의 합리적 경제인이 우리처럼 현명해 지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문명에 대한 지식과 우리의 문명 속에서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것일 터인데, 이를 학습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현명한 삶을 알려주는 지식의 보고인 고전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다.
왜 동서양 고전인가?
현실적인 인간이 합리적 경제인보다 더 현명할 수 있는 것은 역사 구체적인 문명을 자기 안에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내면화된 문명을 우리는 사회적 자아라 이름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합리적 경제인으로서의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인 사회적 자아와 더불어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해 상의하여 그 해답을 찾아낸다.
이 사회적 자아가 지향하는 현명한 삶은, 역사 구체적 문명에 특수한 해법이기 때문에, 역사적 시대에 따라 그리고 문명의 권역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물론 이 다름은 문명이 배타적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명들은 과거의 문명적 성취와 다른 지역의 문명적 성취를 자기 나름대로 흡수하여 만들어간 것이지만, 그 성숙된 형태가 꼭 하나의 형태로 수렴되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한 문명적 해법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문명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또 서로로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문명의 비교적 특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 문명에서 삶의 귀감으로 삼고 있는 고전들에 담긴 현명한 삶을 비교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하려고 하면, 중국문명권과 유럽문명권은 좋은 대상이 된다. 이 두 문명권은 문명의 탄생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형성 및 변화를 기록한 다양한 고전을 갖고 있다. 동서양 고전은 문명의 종차와 그 발전 형태의 차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켜 줄 지식의 보고인 셈이다.
맹자적 도덕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적 도덕경제
물론 이 지식의 보고에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명의 종차와 그 발전 양식을 보여줄 나침판이 필요하다. 나침판은 변함없이 한곳을 가리킨다. 만약 그것이 변함없이 한곳을 가리키기만 한다면, 그것이 어디를 가리키는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나침판을 길을 찾는 유용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문명의 종차 및 그 발전 양식을 보여 줄 나침판도 이와 같은 것인바, 문명에 대한 유형론적 사유가 바로 그것이다. 다양한 유형화가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그 다양한 선택지 앞에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알기 위해 계속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유형론은 존재론적 분류학이 아니라 문명의 비교적 특질을 발견해 나가기 위한 작위적이고 편의적인 방법론적 설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간명한 유형화를 시작해 보자. 세계에는 동국(東國)과 서국(西國)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가상적인 나라가 있다. 동국이라는 가상적인 나라에는 맹자라는 현인이 살았었고, 서국이라는 가상적인 나라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현인이 살았었다. 이 두 나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국(市國)이라 불리는 새로운 가상적인 나라로 변해 갔는데, 동국에서 변화해서 만들어진 시국(市國)과 서국에서 변화해서 만들어진 시국(市國)은 시국(市國)으로서의 동질성을 갖지만, 상당한 정도의 문명적 차이를 갖는다. 우리의 유형론에는 형식적으로는 동국, 서국, 시국이라는 세 가지 가상적인 국가의 유형이 있지만, 실제 동국에서 변화해서 만들어진 시국과 서국에서 변화해서 만들어진 시국 간에 차이도 있기 때문에, 이것도 유형적 차이로 본다면 4개의 유형이 있는 셈이다.
고대 세계에 존재했던 동국과 서국에서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그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 나라의 구성원들의 생존 및 그 집단의 재생산의 안정을 일차적인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 경제체제를 도덕경제(moral economy)라 한다.
구성원들의 생존 및 그 집단의 재생산의 안정을 추구하는 자족적인 단위를 집(House)이라 하는데, 동국에서 그 집은 가산제적 국가였으며, 서국에서 그 집은 오이코스라 불렸던 노예제 경제를 포함하는 가정이었다. 가산제 국가였던 동국은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도록 토지를 분배하거나 재정적 자금을 마련하여 국가적 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삶의 안정을 기했다. 반면, 오이코스라 불렸던 가정에 기초한 서국은 노예제 경제를 포함한 생산적 결합으로서의 재산(property) 때문에 오이코스가 자족적 단위로 유지되었으므로, 이 재산을 서로 존중해 주는 체계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동국의 도덕경제를 맹자적 도덕경제로, 서국의 도덕경제를 아리스토텔레스적 도덕경제로 이름한다. 맹자적 도덕경제에서 생존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기초는 국가의 통치권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 도덕경제에서 생존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기초는 오이코스(가정)의 재산권이었다.
이 동국과 서국은 점차 시국(市國)으로 변화되어 가는데,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는 시국은 생존권이 일차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재산을 가진 각 개별 가정은 시장경제 속에서 사회적 분업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자신의 생존과 재산의 보존 및 확대를 기도한다. 국가는 시장경제의 원활한 운용을 지원하는 제도적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고 집행하기 위해 통치권을 행사한다. 재산권과 통치권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두 기축으로 변화된 셈이다. 생존권은 사회가 추구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체계는 존속하기 어렵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생존권은 성장에 기초한 생존권 보호나 재분배적 복지에 기초한 생존권 보호라는 방식으로 보호되는데, 이 생존권의 보호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희생이 아니라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성취라는 형태로 획득된다. 생존권의 보호가 성장에 기초하는가 재분배적 복지에 기초하는가에 따라 자유주의 시장경제도 산업자본주의와 복지자본주의로 분기된다.
도덕경제의 시장경제로의 근세적 전환
도덕경제를 시장경제로 변화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사실 고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것은 현명한 사람의 편재성이다. 고대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현명하였다면, 현대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현명하다. 이와 같은 변화를 문명의 하향 심화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사람이란 문명적 성취의 내면화로서의 사회적 자아를 확립한 사람으로, 한 인간이 현명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문명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고대에는 이와 같은 학습을 받은 사람이 소수였으며, 그들은 현인으로 대접받았다. 동국에서는 군자(君子)라는 이름으로 서국에서는 시민(市民)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들은 소인과 군자, 노예와 자유민이라는 상이한 두 계급의 수직적 분업 체계 속에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이후 문명은 하향 심화되면서, 소인(小人)은 군자(君子)로, 노예(slave)는 해방노예(freed man)를 거쳐 자유민(free-born man)으로 상향 이동하는 대전환이 이루어졌다.(물론 이러한 견해에 모든 경제사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레고리 클라크는 중세 시대의 생존경쟁 속에서 해방노예들은 멸종되고 자유민의 후손만이 번식에 성공하여 문명의 하향심화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상향 이동이 없는 하향 심화인 셈이다.) 이와 같은 문명의 하향 심화는 경제체제의 변화를 동반한 것이었다. 동국에서는 경제적 자족성을 독점하고 있던 가산제 국가로부터 일반 백성이 자립하여 가는 과정으로서 진행되었는바 집약적 소농경제와 지역자립화가 그것이었다. 서국에서는 노예제 경제에 기초한 오이코스가 해체되면서 각 개인들이 자립하여 가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바 이렇게 자립한 사람들의 자족성을 보완해 준 것은 시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역적 시장통합과 원기적(proto)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주목하여 두어야 할 것은 동국과 서국은 맹자적 도덕경제와 아리스토텔레스적 도덕경제라는 상이한 문명의 유형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것의 근세적 전환과정도 동일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문명의 다양성은 사실 문명의 발전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동국의 근세적 전환을 서국의 경험으로 독해하는 것이나, 서국의 근세적 전환을 동국의 경험으로 독해하는 것은 문명의 진화를 상대화하여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문명 발전의 경로의존성과 내발성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보지 못하게 되는 사각지대도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공공(公共) 사회와 공정(公正) 사회
근세적 전환은 모든 인간들이 현명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역사적 전환의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각 인간은 내면화된 문명으로서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는데, 이 사회적 자아의 지향점은 문명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크게 보면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공공(公共)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자아와 공정(公正)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자아가 그것이다.
공공(公共)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자아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합리적인 경제인이 자신의 후생만을 고려하지 말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후생도 고려하면서 의사결정을 하도록 유도한다. 공정(公正)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자아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합리적 경제인에게 타인을 차별적인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 수 있는 선택 행위를 하지 않도록 제한함으로써, 자신도 차별적 상황에 놓이지 않는 제도적 환경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한다. 통상적으로 전자를 집단주의적인 사회적 자아로, 후자를 개인주의적인 사회적 자아로 이름한다. 양자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현명한 삶을 살게 하는 문명적 해법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다.
현명한 삶을 위한 역사적 경제체제로의 지적 모험
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는 현명한 삶을 위한 역사적 경제체제로의 지적 모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현명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현명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야 하는가? 현재 경제학 교과서가 제기하지 않는 문제이다. 그러나 경제학이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기존에 발전시켜 온 다양한 경제분석틀을 이용한다면, 우리의 문명 속에 담긴 현명한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경제학 자신도 현명한 학문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43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