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이 0%다!” 누구일까? 유영철과 같은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아니다. 공식 통계상의 166명이기는커녕 이보다 몇 배에 이르는 시민을 학살하며 정권을 탐한 전두환이나 노태우도 아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대해 ‘따랐을 뿐’이라던 ‘살덩어리 기계’ 아돌프 아이히만도 아니다. 지난 7월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중국의 영화배우 판빙빙이 그렇단다. 청룽(성룡)이 그렇단다.
BBC가 지난 9월11일 보도한 내용을 보면, 베이징사범대학교 뉴미디어전파연구센터 등은 ‘중국연예인 사회책임연구보고서(2017~2018)’를 9월 초 발간했는데, 여기에서 판빙빙과 청룽의 사회적 책임 평가를 측정한 지수가 0%로 돼 있다. 보고서는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중국 연예인 100명을 대상으로 ‘직업 분야’, ‘자선활동 분야’,‘개인의 청렴성’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작성됐는데, 각 분야가 어떤 기준으로 측정됐는지 공개되지 않았다. 보고서 작성자는 ‘조사와 웹 추적’으로 평가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판빙빙은 떠들썩한 탈세 논란의 장본인이다. 실거래가보다 낮춰 쓰는 아파트 ‘다운계약서’처럼 출연료 다운계약서를 쓴 혐의를 받고 있다. 긍정적인 영향력이 낮은 건 당연하다. 중국 사회를 비판하는 의견을 자주 밝히던 청룽도 그럴 수 있다. 중화주의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도대체 0%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인가? 조사와 웹 추적을 통해 평가했다면, 그동안 이들의 자선과 선행을 발견했을 것이고, 이것을 어떻게 반영할지 고민했을 텐데 말이다.
개인의 선호와 행동, 대인관계를 평가하는 중국의 사회신용평가
책 한권이 떠올랐다. <당신은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가? - 우리에 대한 정보 집적의 기술과 기술이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이유(Who Can you Trust? - How Technology Brought Us Together and Why It Might Drive Us Apart)>로 제목이 길다. 2017년 10월 출간돼 중국 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내용은 중국 국무위원회가 2014년 6월 내놓은 ‘사회신용평가시스템(SCS) 구축 개요 설계’가 갖는 함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것이다.
SCS의 개요는 이렇다. ‘공무상의 정직, 상업상의 정직, 사회상의 정직, 사법신뢰의 구축을 강화시키기 위해 신뢰가 활짝 꽃피우는 공론장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 위해 전국적인 신뢰와 정직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도록 13억 시민(법인 포함)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SCS를 개발한다.’
이런 목적을 지닌 SCS는 처음에는 자발적인 참여에서 시작하지만 2020년에는 의무화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SCS 개발 면허는 8개 민간회사에 내주는데, 여기에는 중국 굴지의 데이터 업체들이 참여한다. 하나는 8억5천만명이 사용하는 위챗을 개발한 소셜네트워크 공룡기업인 텐센트다. 개발 면허를 받는 차이나 래피드 파이낸스(China Rapid Finance)의 제휴 대상이다. 다른 하나는 알리바바다. 계열사인 앤트파이낸셜서비스그룹(Ant Financial Service Group)이 운영하는 세사미 크레딧(Sesame Credit)을 통해 참여한다. 이 계열사는 보험상품과 중소기업 대출 업무를 한다. 세사미 크레딧은 우버와 같은 공유택시 플랫폼인 ‘디디추싱’, 중국 최대의 데이트 사이트인 ‘바이허’와 협력하고 있다.
비디오 게임을 하루 10시간 동안 하는 사람은 게으르다?
사회신용평가를 하는 알고리즘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알리바바가 공개한 5가지 평가기준은 △신용 경력(연체는 없는지 등) △수행능력(계약의무를 이행하는 능력이 있는지) △개인적 특성(전화번호나 주소 등) △행동과 선호 △대인관계다. 이 평가기준 중 행동과 선호, 대인관계가 가장 문제가 된다.
알리바바의 설명을 보면 “비디오 게임을 하루 10시간 동안 하는 사람은 게으르다”고 평가하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선호와 행동에 대한 평가가 중국 정부가 좋아하지 않는 선호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유도로 이어지는 건 매우 쉽다. 대인관계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상의 친구 맺기나 상호작용으로 평가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다. 이를테면 정부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나, 중국 경제는 잘 굴러가고 있다는 식의 메시지가 등급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 사귄 친구가 정부 비판적인 얘기를 꺼내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사회신용평가에까지 영향을 준다. 속칭 ‘바른 소리’ 하는 사람과는 놀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얘기다. 아마도 중국 연예인사회책임평가보고서에서 판빙빙과 함께 0%를 받은 청룽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쓴 저자인 레이첼 보츠만은 “SCS가 중국 공산당의 감시방법인 ‘당안’(dang'an)을 게임화시켜 만든 빅 데이터”라고 평가한다. 이를 통해 결국 ‘게임화한 복종’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과 ‘악의 진부화’를 발견했다. 복종을 낳는 게임화한 빅데이터는 디지털 판 악의 진부화에 해당할 듯싶다. 레이첼은 공유경제의 중요성을 다룬 책 <위 제너레이션>의 공동 저자이자 미국 컨설팅단체 ‘콜라보레이티브랩’의 공동 창립자다. 레이첼 책의 파장은 컸다. 책이 나온 뒤 중국인민은행은 8개 민간회사에 주려던 SCS 개발 면허를 유보했다. 하지만 2020년 SCS를 의무화시키겠다는 계획은 그대로인 상태다.
판빙빙과 청룽의 긍정적 영향력 0% 보고서=SCS의 연예인판일까?
판빙빙과 청룽을 포함한 중국 연예인 100명에 대한 사회책임연구보고서가 SCS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사와 웹 추적을 통해 이뤄진 만큼 평가기준과 판단은 SCS와 상당히 유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연예인용 ‘SCS 시범판’의 성격을 띠고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판빙빙을 둘러싼 떠들썩한 탈세 논란 과정에서 ‘연예인 사회책임평가보고서’라는 형태로 SCS의 일각을 엿본 게 아니기를 바란다.
끝으로, 판빙빙이 중국에 한 가지 분명한 기여를 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 연예인이 출연작 계약서를 두 장 쓴다. 하나는 출연료가 1,000만 위안으로 표기된 계약서이며, 다른 하나는 6,000만(약 100억 원)으로 책정된 계약서다. 4일 동안 촬영장에서 일하고 받는 금액이다.”중국 CCTV 아나운서 추이융위안의 SNS로 시작된 판빙빙 탈세 논란 이후 중국 당국은 영화, 드라마 등 영상물을 제작할 때 주연배우 출연료가 전체 출연료의 70%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제작사들은 드라마 한 시즌당 출연료가 5천만위안(약 82억원)을 넘지 못하도록 자율 규제안을 마련했다. 주연배우 출연료 주고나면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의 인건비 등 다른 제작비를 감당하기가 빠듯한 사정은 한국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개발독재가 아닌 터라 한국에서 주연배우들의 자발성을 제외한 다른 뾰족한 방법을 못 찾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판빙빙은 역설적이게도 참 좋은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