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하게 ‘레드라인’을 넘는 상대방에 무력감을 느낄 때 수치와 모욕, 자괴감이 밀려든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나 크게 다르지 않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경우가 그래서 생기곤 한다.
미‐중 무역분쟁에서 미국이 부당하게 ‘레드라인’을 넘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건강과 의료의 부담을 오롯이 기업에게만 지우는 건강․의료체계, 과도한 의약특허와 지식재산권 보호 등 미국 내부의 산업경쟁력을 훼손하고 국민의 후생을 갉아먹는 미국 내부의 제도적 문제점이 심각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럼프 이전에 버락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가 적어도 건강․의료 제도만큼은 손대려 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트럼프 행정부가 제기하는, ‘오프쇼어링’이 국내 제조업 기반을 침식하고 일자리 위기를 만들어냈다는 주장만큼은 일방주의라는 잣대로 평가절하 하기는 어렵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후발 제조업 국가의 선례가 있기는 했지만, 그 규모와 깊이, 영향의 측면에서 ‘중국 효과’와 견주기는 어렵다. 그만큼 낮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 등 유리한 근로조건을 활용한 이윤 추구를 위해 전 세계를 휘젓고 돌아다닌 기업 주도 글로벌화의 폐해가 미‐중 무역분쟁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주도 세계화, ‘무역=제로섬’ 인식 부추겨
물론, 무역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기업 주도의 글로벌화는 바로 그런 제로섬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도 사실이다. 산업구조가 고도화한다고 해도 서비스업 쪽으로 몽땅 특화할 수 있다는 건 데이비드 리카도 식의 비교우위 ‘이론’에서나 가능한 탁상놀음이라는 현실, ‘때 이른 탈산업화’(premature deindustrialization)가 제기되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미‐중 무역분쟁에서 중국이 새로운 세계화의 담론과 의제를 던지지 못하고 그저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답답함도 여기서 비롯한다. 투자자의 권리와 동등하게 근로자의 권리를 무역협정에 담아내고 다자주의에 기초해 ‘사회적 덤핑’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국이 주도하리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에게서 미국의 거울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주목되는 건 여전히 유럽연합(EU)이다. 미‐중 무역분쟁의 와중에서 유럽연합은 부당하게 ‘레드 라인’을 넘는 미국을 무력하게 지켜봐 왔다. 트럼프가 2017년 6월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2018년 5월 이란 핵협정(JCPOA; 포괄공동행동계획)에서 이탈할 때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유럽연합이 느끼는 수치와 모욕, 자괴감이 점점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발틱해 연안을 따라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연결사업인 Nord Stream 2를 추진하는 독일에 대해 “러시아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포로”가 되는 행위라는 트럼프의 비난이나 유럽 주둔 미군기지의 주둔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라는 트럼프의 요구는 충분히 타협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Nord Stream 2의 경우 연결라인에 우크라이나를 포함하거나, 방위비 분담의 경우 2014년 합의한 국내총생산의 2% 국방비 지출 약속을 이행하는 해법이 있다.
미국의 가신국가 취급 당하는 유럽연합의 굴욕과 수치
하지만 무역분쟁 과정에서 일방주의를 통해 ‘완전한 무시’를 당하는 경우는 사정이 달라 보인다. 다자주의의 챔피언’을 자임해온 유럽연합의 위상 자체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미‐유럽연합 무역분쟁은 지난 6월 유럽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25%, 10% 수입관세 부과로 시작됐다. 이후 지난 7월 금융, 에너지, 건강․의약 등 주요 산업들에 대한 수입관세 부과 면제를 요청하는 유럽연합의 중재 탄원서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에 의해 공식 거부당했다. 이 중재안에는 유럽연합과 양대 회원국인 독일, 프랑스는 물론,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의 장관들까지 서명했다.
특히, 유럽연합에게 이란 핵협정의 파기는 유럽연합의 경제는 물론 지정학적 안보 위협을 한층 더 가중시키는 양보할 수 없는 ‘레드 라인’이다. 유럽연합의 균열을 낳고 있는 난민 문제의 기원이 이라크 침공을 비롯해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대테러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더욱 그렇다. 이란 핵합의 유지와 미국의 대이란 제재 동참 여부를 놓고 유럽연합 내부에서는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럽연합 맹주인 독일 외무장관 하이코 마스가 8월21일 독일 일간지에 쓴 기고문이다. ‘미국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우리를 희생시키는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제목의 글에서 마스는 “그렇지 않았을 때 중동을 위협하는 고도로 폭발적인 위기보다 이란 핵협정이 계속 존재하는 매 순간이 더 낫다”며 미국이 떠나고 남는 자리를 유럽이 메우는 “균형잡힌 동반자 관계”의 창출과 “미국이 레드라인을 넘을 때 균형추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럽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그는 미국으로부터 독립된 지급․결제 채널 구축, 유럽통화기금 창설, 독립적인 스위프트(SWIFT)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독립된 통화 결제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선언한 유럽연합
다른 하나는 9월12일 발표된 ‘유럽연합 주권의 시간’이란 제목의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의 연두교서다. 여기에는 “미국으로부터 에너지 수입은 고작 2%인데, 연간 3천억유로에 이르는 유럽연합 에너지 수입액의 80%를 달러로 결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유럽연합 기업들이 유로가 아닌 달러로 유럽 비행기들을 구매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가 우리를 이 길로 내몰고 있다는 설명도 들어 있다.
두 사건 모두 유럽연합이 더 이상 미국의 ‘가신국가’가 아니라 자율성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확인하고 있다. 시험대는 불과 한 달도 안 남겨두고 있다. 바로 11월6일 치러지는 중간선거을 앞두고 시행하겠다고 트럼프가 밝히고 있는 이란 산 원유 거래 중단이다. 이 제재가 발효하면 제재 대상 이란 은행들을 스위프트로부터 차단하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스위프트 이사들과 이들을 고용하는 유럽의 금융기관들이 상응하는 조치들을 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직면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산 동결, 미국 여행 금지, 미국에서 사업능력 제한이 포함될 수 있다. 스위프트(SWIFT)는 벨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 결제네트워크인데, 2012년 쿠바산 시가의 결제 차단 등 미국의 제재를 집행하는 데 이용돼 왔다. 그때 미국은 금수 품목이던 쿠바산 시가의 결제대금을 덴마크 기업이 독일 은행으로 보내는 시도를 중간에 저지했다.
이란 핵 협정을 유지하면서 지정학적 안보 위협을 완화시키려는 유럽연합의 노력이 성공을 거둘지는 불확실하다. 최근 악재도 터졌다. 지난 10월3일 프랑스 정부는 지난 6월 파리 외곽에서 이란 반정부단체 행사를 겨냥해 발생한 테러 기도 사건의 배후로 이란 정부를 지목하고 이란 정보부의 프랑스 내 자산을 동결한 것이다. 운신의 폭이 유럽연합은 줄어들고 트럼프는 더 넓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이란 핵 협정의 파기를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러기엔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연합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으로부터 독립된 지급․결제 채널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페데리코 모게리니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이란과의 합법적 금융거래를 촉진하고 유럽의 기업이 계속해서 이란과 거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토탈, 이탈리아 ENI 등 유럽연합 에너지 기업들이 여기에 따라줄지는 불확실하다. 불안한 이란 시장보다 확실한 미국 시장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험대로서의 미국의 대이란 원유 거래 제제
이것이야말로 유럽연합 주권의 시간이 시험대로 올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애초 출범 당시부터 유로화의 운명은 ‘페트로 달러’(석유 달러)로 상징되는 국제통화질서의 분점이었다. 미국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지급․결제 채널과 스위프트 구축의 바람은 이를 위해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는 미국이 가장 아파할 수 있는 부분, 바로 달러 패권에 대한 균형추를 설정하는 것이다.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의 가능성은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금의 축’(axis of gold)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불과 10년새 407t에 불과하던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을 2000t까지 끌어올린 러시아나, 600t에서 1840t까지 끌어올린 중국의 최종 지향점도 결국 달러 패권에 대한 균형추 확보다. 유럽연합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균열이 이런 흐름과 합쳐질 수 있을까? 트럼프와 네오콘의 일방주의가 계속되는 한, 서로 달리 흐르는 균열의 물줄기가 하나로 방향을 트는 시간은 앞당겨질 것이다. 공교롭게도, 중국이나 러시아나 유럽연합이나 모두 대륙세력이라는 점에서 같다. 결국, 해양(미국)세력에 대해 대륙세력이 겪는 균열이 한데 모아질 수 있느냐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상징하는 대금융위기 발생 이후 ‘뉴노멀’로 불리는 지난 10년은 격렬한 균열의 시기다. 그런 균열의 과정 속에서 빚을 많이 질수록 강해지는 달러 패권에 내재한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이 없는 통화질서, 적자국과 흑자국 모두 국제수지 불균형 해소의 의무를 지니는 국제금융체계, 투자자의 권리와 근로자의 권리가 동등하게 취급되고 발전 수준이 다른 나라들에서 정합 게임이 이뤄지는 국제무역질서로 이뤄지는, 기업 주도의 세계화가 아닌 관리되는 세계화를 향한 진전이 이뤄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람직한 다자주의라면, 유럽연합이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맞다. 관세동맹과 단일시장 유지, 인권과 근로자의 권리 등 근본적 사회권의 신장이라는 통합의 핵심을 유지하면서, 일률적인 잣대의 경제통화동맹이나 난민 정책 등에서 유연성을 발휘하는 제도의 설계라는 내부적인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주권의 시간’이 시험대를 통과하며 ‘일타쌍피’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