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유력 그룹의 총수들이 잇따라 퇴진하면서 한국의 독특한 혈연적 거대자본 집단인 '재벌(chaebol)' 문화도 전환의 시기를 맞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요 그룹들이 연이어 자회사 독립경영과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구조를 채택하는 방식으로 과거와 같은 선단식 경영에서 탈피하는 가운데 '재벌의 상징'으로 군림해온 총수들의 퇴진까지 이어지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른바 '제왕적 총수 권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룹 총수는 여전히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데다 '중앙집권식 경영'의 장점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는 어렵다는 진단도 있다.
16일 재계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60대 대기업집단의 동일인(총수) 가운데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이사회 의장에서 사퇴하는 사례가 최근 속출하고 있다.
재계 서열 45위인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은 창립 50주년을 맞은 이날 전격적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국내 재계에서 거의 사라진 그룹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인 김 회장은 '후배들이 일할 수 있도록 물러서야 할 시점'이라는 판단 하에 퇴진 의사를 밝혔으며, 앞으로는 '재계 원로'로서의 역할만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재계 25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삼구 회장은 핵심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의 감사보고서 문제 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달 전격적으로 사퇴했다.
나아가 지난 15일에는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결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은 에어부산, 아시아나IDT, 아시아나에어포트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어 이를 매각할 경우 그룹의 덩치는 급격히 쪼그라들게 된다.
재계 서열 14위인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재선임안이 부결되면서 대표이사로서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최근 몇년간 갖가지 악재에 시달려온 조 회장은 지난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한 병원에서 폐질환으로 별세했으며, 닷새간의 장례절차를 마치고 이날 선친인 창업주 조중훈 회장 옆에 영면했다.
지난해 11월 말에는 재계 31위 코오롱그룹의 이웅열 회장이 경영상의 큰 변수가 없는 가운데 전격적으로 자진 사퇴를 선언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밖에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지난 2017년 9월 비서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면서 불명예 퇴진했고, 조석래 전 효성 회장도 같은 해 7월 그룹 지주사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하면서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경영 일선 퇴진은 아니지만 총수들이 이사회 독립성 강화 등을 취지로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나는 사례도 최근 이어졌다.
서열 3위인 SK그룹은 최근 지주사인 SK㈜의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도록 한 정관을 변경해 최태원 회장이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재계 26위인 효성의 조현준 회장도 지난해 지주사의 이사회 의장에서 사퇴했다.
또 서열 1위인 삼성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면서 그룹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사실상 계열사 독립경영 체제로 전환했으며, LG그룹도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계열사 최고경영진의 역할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변화에 대해 재계 안팎에서는 '한국형 재벌 문화'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개별 그룹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데다 총수가 퇴진한 그룹의 경우도 상당수는 일정 기간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2세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에서다.
삼성 이재용, 현대차 정몽구, SK 최태원, LG 구광모, 롯데 신동빈 등 총수의 결단이 그룹의 중요 의사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여전하다.
다만 글로벌 경쟁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과거와 같은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사라진 상황에서 총수가 그룹 경영을 혼자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사실상 지나갔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와 같은 '제왕적 총수'는 이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고 봐야 한다"면서 "그러나 우리 경제에 기여한 공로 등을 감안하면 무조건 총수 역할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울러 "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도 재벌그룹의 변화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