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하게 균형을 맞추다가 치열해지는 바둑
[이코노미21 이재식] 오유진 9단(이하 ‘오유진’)이라는 이름이 주는 중량감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인터뷰 장소에 나왔다. 체구와 얼굴이 무척 작고, 사진이나 영상 속 모습보다 실물이 훨씬 아름다웠다. 바둑계에서 ‘여신’으로 불리는 것이 과장된 표현은 아니었다.
‘오유진이 생각하는 최고의 라이벌은 최정 9단인가?’라는 가장 불편할 수 있는 질문부터 던졌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았을 질문에 대해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라이벌로 의식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작년과 올해 최정과의 의미 있는 승부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유진은 작년에 여자국수전과 여자기성전에서 최정을 물리치고 감격의 우승을 했고, 올해 여자오청원배 준결승전에서도 최정을 꺾은 후 결국 우승컵을 안았다. 최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바둑계를 충격과 환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대사건이었다.
오유진은 최정을 만나면 다 이긴 바둑도 지고, 불리한 바둑 역시 졌다. 최정 상대 연패 기록은 바둑계의 역사에 남을 전적이고, 오유진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전적이었다. 오유진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였다. 바둑 내용이 딱히 나쁜 것도 아니니 뭐라 조언을 할 수도 없고, 오유진이 못 둬서 진다기보다 최정이 너무 잘 둬서 이긴다고 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정말 많은 주변사람들로부터 우승한 후 울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최정 콤플렉스로 오유진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오유진을 좋아하는 팬들도 궁금한 분들이 많았다고 하니 알려 드리자면, 오유진은 울지 않았다고 한다.
최정과 오유진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석에서는 언니라고도 부르고 ‘최찡’이라고도 편하게 부르는 무척 친한 사이다. 오유진은 최정의 강한 멘탈을 가장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멘탈이 쿠크다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터라, 작년 우승 이후 사람들이 다르게 봐 주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소위 말해 예전의 오유진이 아니라는 거다.
거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결승전에서 최정에게 졌을 때 마음이 상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상대가 미울 때도 있지 않냐고 물었다. “굉장히 친하지만 아픔을 가장 많이 줬던 기사이고, 일방적으로 질 때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거다, 극복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잘 안 된다. 너는 속도 없냐? 친하게 지내면 이길 수가 없다는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그런 시기가 있었다. 시합 끝나고 나면 일주일 정도 거리가 느껴지고...저절로 내려갈 때까지 기다린다”는 비교적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일단’이라는 단서는 붙었지만 대국에서 지더라도 최정과 복기는 한다. 자책하는 마음이 온 가슴을 후벼 파는 그 시간들을 묵묵히 참아낸 결과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오유진은 일정관리는 물론 바둑 관련한 일에 가족들이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본인의 매니저 일은 한국기원이 해 준다고 할 정도이니 독특하다. 매니저의 역할이 필요하고, 매니지먼트 회사가 접촉해 온다면 기꺼이 협의할 용의가 있지만 지금은 바둑에만 전념하겠다고 한다.
오유진의 집과 한국기원의 거리가 멀어 직접 운전을 하는지 물었다. 운전면허증도 있고 자동차를 살 여력도 생겼지만 아직 본인 소유 자동차는 없다. 시합에 정시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을 훨씬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 한 판 이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중요한 대국에 늦어 지각패 한다면 그것보다 어이없는 경우가 없으니 이해할 수 있다.
7~80년대를 풍미했던 조-서 시대에도 서봉수 9단의 팬이 정말 많았다. 서봉수는 사석에서 ‘나는 조훈현의 샌드백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압도적인 열세였지만, 서봉수에 대한 동정심 보다는 된장바둑으로 불리던 서봉수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오유진과 최정도 조-서와 결이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오유진에게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찐팬’이 정말 많다. 팬들이 어느 정도 많은지는 바둑 유튜브 몇 군데만 들러 봐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작 팬클럽은 없다고 한다. 바둑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팬클럽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활짝 웃는 모습이 정말 천진난만하다.
프로기사들과 관계가 좋은지 물어봤다, 약간 까칠한 성격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주변 기사들의 평가는 하나같이 더 이상 착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갑자기 심술궂은 이야기를 꺼내 봤다. 시간이 좀 지난 이야기지만 오유진의 흑역사가 유튜브에 돌아다니니 궁금한 분들은 한 번쯤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후배 남자기사와의 대국에서 일부러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바둑을 어이없이 지자 열 받아서 씩씩거리는 모습이 그대로 TV에 중계된 것이다. 오유진은 그 때 절제가 되지 않았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지면 안 되는 바둑은 꼭 반집을 지는데...감정이 다 드러났다. 영상이 알려져서 우연히 봤더니 내가 봐도 창피하더라” 그런데 그 영상을 본 사람들은 다들 재미있어 하고,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고 평가하니 아이러니하다.
오유진은 충암중학교와 바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바둑고등학교는 순천에 있고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만 오유진은 순천에는 거의 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쳤기 때문이고, 특기생들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이 그렇듯이 대학 진학은 안 했다.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지만 대학 생활의 낭만은 느껴보고 싶다고 한다.
오유진의 기풍은 끝내기와 후반이 강하고, 침착하게 균형을 맞추다가 치열해지는 바둑이었다. 최근 오유진은 후반에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둑이 우세할 때 다 두드려 잡을 수 있는 것을 적당히 물러서다가 지기도 하니까 기회가 오면 아예 ‘끝을 봐야겠다’로 기풍이 바뀌고 있다. 요즘 상대 기사들이 누구 하나 만만치 않다. 사실 정상권에서 맴도는 프로기사들의 실력은 차이가 거의 없어 일방적으로 압도하기는 쉽지 않다. 오유진은 자신의 바둑에 변화가 있어야 더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가장 주목 받는 기사 중 한 명인 김은지한테 세 번을 졌는데, 바둑 관계자들이 아직은 오유진 상대가 아니라고 하는 김은지에게 진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대국 전에 자신이 있었지만 한 번 지고 두 번 지니까 부담이 생기더라. 김은지는 정말 열심히 하는 기사다. 부담도 됐지만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됐다. 실력보다는 ‘부담이 커서 그런 것 아니었냐고’ 묻지만 한 선수에게 세 번을 이겼다는 건 실력이 부족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으로는 김은지, 김채영, 조승아, 김민서 등을 꼽았다. 최정은 경쟁상대가 없었는데 오유진은 정상에 오르면서부터 신예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니 불행이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경험처럼 드러나지 않는 부분으로 도전을 받아 나갈 생각이다.
최정과의 새 역사는 국수전이 먼저였다. 국수전과 기성전은 마음이 달랐다. 오유진은 최정에게 5년 동안 15연패를 당했다. 정말 한 판 이기는 것이 간절했다. 승리한 기억이 없으니까 이겼을 때도 이긴 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승1패로 우승했는데 첫판을 이겼다. 어떤 상대라도 그렇지만 특히 최정과는 계가 전까지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니까 이겼다고 생각해도 불안했다. 항상 그런 상태에서 역전패 한 적이 많으니까 계속 바둑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하고 흔들린다.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말자고 결심해도 흔들리고, 본인이 흔들리면 상대도 그것을 느낀다. 상대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면 프로기사들은 잔인해진다.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공격하고, 심지어 항복의 의사를 받아 주지 않고 바둑판을 유린하기도 한다. 다음에 또 만날 거니까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기를 꺾어 놓고 싶은 것이다. 바둑 한 판에 원수가 되는 일도 흔하다. 최정을 꺾고 우승했을 때 오유진보다 부모님의 기쁨이 더 컸다. 사실 부모님들도 오유진 못지않게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다.
작년에 최정을 꺾고 국수전을 우승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기성전까지 연이어 우승하자 비로소 최정을 극복했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최정에게도 부담감이 있을 수 있었고, 운도 작용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부담감도 실력이고, 운도 실력인 것이 프로 바둑이니 이 시점에서 오유진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다.
중국 랭킹 1위 커제와의 온라인 대국이 한국에서도 화제였지만 중국에서는 말 그대로 ‘장안의 화제’였다. 연습경기에 가까운 온라인 바둑이어도 커제가 지지 않으려고 기를 썼는데 졌기 때문에 화제가 된 것이다.
커제는 여자기사들과는 국적을 막론하고 유일하게 최정하고만 가끔 바둑을 둔다. 예전의 명성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커제의 대국 요청이 오면 무조건 받고 본다. 유명세에다 그만큼 배울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커제는 요즘 한국에서 잘 나가는 오유진과 바둑을 두는 자체로 자신이 운영하는 중국 유튜브 채널 ‘빌리 빌리’에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고, 미녀기사로 소문난 오유진과의 대국은 더욱 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커제의 계획은 흥행에서는 성공했지만,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망신살이란 망신살을 만방에 떨친 최악의 참사를 당했다. 대국의 결과는 커제의 2승1패였으나 세 판 모두 오유진의 압도적인 대국 운영이 빛나는 바둑이었다.
커제에게서 대국신청을 받은 오유진은 냉큼 신청을 받으면서도 ‘이거 뭐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커제가 자신에게 대국신청을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국의 내용이 좋았고, 커제를 숨도 못 쉬게 몰아 부친 오유진의 완승이었다. 커제는 열이 받자 오유진과 세 판을 연달아 뒀다. 한 사람과 세 판을 연달아 두는 것은 커제에겐 드문 일이다. 2국도 내용상 커제가 진 바둑을 간신히 이겼고, 3국도 만만치 않았다. 이 세 판의 바둑을 중국인 60만이 동시에 시청했으니 월드컵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열기였다.
그 뒤로는 커제에게서 대국 신청이 안 들어온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계 챔피언이 가볍게 몸 풀려고 스파링 상대를 고르다 KO를 당했고, 실수였다고 우기고 싶어서 두 번 더 스파링 했더니 진짜 실력으로 못 이길 것 같은 상황이라 슬슬 피하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대국 하면 이길 거 같냐는 질문에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고 싶지는 않다”라는 답변이 돌아 왔다,
이제 오유진의 시대가 올 것인가?라고 물어 봤다. “지금은 막막한데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오유진은 대답했다. 오유진에게 2023년은 정말 중요한 해가 될 거 같다. 내년의 성적이 오유진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할 수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오유진의 시대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이코노미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