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가 폭등세를 보였다.
살로먼스미스바니의 반도체 담당 애널리스트 조너선 조지프가 반도체 경기가 바닥에 임박했다며 투자의견을 상향 조정한 것을 계기로 5일 동안 무려 26%나 반등했다.
18일에는 장중최고치 673.66포인트를 기록해 하룻만에 17% 이상 상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마침 인텔의 실적호전 전망이 호재로 작용했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긴급인하하면서 시장 전반으로 폭발적 매수세가 일었다.
시장의 세세한 전후 맥락이나 향후 전망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이날 결과에 쾌재를 부를 사람은 당연히 조지프이다.
지난해 7월 초 과감하게 반도체 경기정점 통과 및 하락반전을 주장해 살해협박까지 받았던 그가 이번에 또다시 그 값어치를 인정받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막 불붙고 있던 ‘반도체 경기 바닥논쟁’의 나머지 주역들은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 주장의 진위 여부와는 무관하게 시장의 움직임이 이미 ‘예측’을 앞질러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크린 보고서 해석따라 희비 엇갈려 반도체 경기 바닥논쟁을 한꺼풀 벗기고 보면 조지프가 유별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사람과 한통속(?)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조지프가 지난해 비판자들에게서 “너무 성급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경기바닥을 주장하기에는 이르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현상에 현혹되지 말자. 조지프는 지난해 7월 “지금이 반도체 경기 정점이다”며 충격파를 던지기 바로 한달 전 메릴린치의 반도체 애널리스트 조 오샤 등과 함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대한 투자의견을 상향 조정함으로써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 지난해 5월까지 반도체 분석가들 가운데 가장 ‘과격’한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은 리먼브러더스의 댄 나일스였다.
그는 당시 “이번 여름이 2년 내지 3년 지속되는 반도체 호황 주기의 정점”이라며 “반도체 종목 투자에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른 분석가들이나 시장분석기관에서는 그에 비해 경기 정점이 늦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조지프가 경고를 보낸 직후 인텔, 애플 등의 수익악화 전망이 잇따르고, 9월 들어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기존 전망에서 후퇴해 투자의견을 하향조정함으로써 논쟁다운 논쟁없이 상황은 멋쩍게 종료됐다.
이 게임의 교훈은 조지프가 시장의 낙관적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반도체 경기를 정확히 읽어냈다는 사실에 있다.
조지프는 당시 북미 반도체장비 수주 출하 비율이 정점을 지났다는 사실과 반도체 일부 가격의 하락 추세, 사상 최고 수준에 달한 업계의 설비투자 규모, 그리고 지속적 금리인상 추세의 부담 등을 한꺼번에 읽어냈던 것이다.
이는 분석방법의 원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여타 분석가들도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조지프가 주장한 그 유명한 근거, “더이상 좋을 순 없다”라는 의견이 이미 시장에 나온 상태였다.
분석가들이 같은 이해에 서 있다는 사실의 근거를 확인해보자. 반도체 업계에서는 매년 발행하는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의 ‘매클린 보고서’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올해 초 보고서에서는 경기정점 통과 이후 후속 추세를 예상하기 위해 지난 30년간의 반도체 경기순환의 특징을 분석했는데, 이 기간에 나타난 다섯차례의 하락 국면 중 75년, 82년, 91년, 98년은 모두 세계 경기침체와 동시에 발생했다는 특징을 보였다.
유일하게 85년만은 재고조정이 이끈 짧고도 강렬한 하락기였다.
보고서는 이번 하락기는 경기둔화, 생산용량 초과, 재고과잉 등 세가지 핵심요소 모두에서 경기하락 요인이 발생하고 있으나, 최근 경기순환의 단축추세 및 변동폭 축소양상 등에 비춰볼 때 2002년부터는 상승국면이 재연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후 매클린 보고서는 연초 보고서에서는 암시에 그친 ‘85년과의 유사성’ 및 ‘3분기 이후 경기반등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경기하락 추세의 강도가 지난 85년 이래 최악이라는 점, 과거에도 반도체 매출 감소가 3분기 이상 지속된 경우가 없었다는 점 등 역사적 추세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매클린의 전망은 업계와 분석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4월 초 나일스의 경고는 매클린 보고서를 과격하게 재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나일스가 시장에서 버림받을 운명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그 주장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조지프는 이처럼 모두들 3분기 전후를 경기바닥으로 여기고 있는 시점에서 이를 좀더 빠르고 명확하게 주장했다.
조지프를 비판한 메릴린치의 조 오샤와 모건스탠리의 마크 애덜스턴 등이 “조지프가 너무 빠르다”고 불평하면서도 경기바닥의 근거에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C 업종 바닥 전망이나 D램 수요 및 가격회복 가능성에 대한 논자들의 차이는 사실 나일스와 직접 연결된다.
이 분야의 회복세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은 바로 나일스의 ‘하락추세 심화’ 우려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가들의 논쟁이 사실은 ‘가족 싸움’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의 주장에 편승해 “지금 반도체 업종 매수를 서둘러라” 혹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족 싸움 편들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나일스의 반격도 기대해 볼 만 한가지 더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지난해 조지프의 승리를 위한 결정타를 날린 것은 바로 애플과 인텔(의 수익둔화 전망 제출)이었는데, 올해도 이들이 실적호전 및 경기바닥론 제기 등으로 지원타를 날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올해는 연준까지 나서 만루 홈런까지 날렸으니 조지프는 참 운이 좋은 사나이다.
그러나 ‘운수 좋은 날’은 항상 뒤를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연준의 만루 홈런 덕분에 조지프의 인기는 반짝에 그쳤다.
사실 연준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결정타를 날린 이유는 앞으로 남은 회전의 불안요인을 미리 제거하자는 계산일 수도 있다.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도 조지프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반도체장비 수주 출하 비율이 상승 반전했다거나 의미있는 수요 증가세가 확인되지 않았다.
조지프의 주장이 명철한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감’에 근거한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2분기 내로 본격 회복조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조지프의 조급한 승부수는 역전패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벤치에서 대기하고 있는 나일스의 모습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조지프의 가족들은 상황만 허락하면 언제든지 나일스를 초청할 것이다.
이들의 가족 싸움에 비한다면 살벌한 시장에서 반대자들과 맞서 싸운 황소(에비 코언)와 곰(워런 버펫)의 대결구도가 훨씬 더 큰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코언은 이전까지 나스닥의 초강세장을 이끈 장본인이고, 버펫은 최근 폭락장세 속에서 20% 이상의 높은 수익률을 올린 백전노장이라는 점에서 이미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코언이 추락하는 장세 속에서 계속 현실과 엇갈리는 전망을 제출함으로써 시장의 미움을 샀다면, 남들이 외면해도 묵묵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한 투자의 달인 버펫이 환대받는 것은 진실의 일단을 보여준다.
코언이 인기라는 단맛에 빠져 판단력을 잃고 있을 때 버펫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시장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프가 둘 가운데 누구를 닮아갈 것인지는 시간이 좀더 흐르면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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