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나라 게임 시장은 1조원을 돌파했다.
1999년 ‘스타크래프트’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이후 ‘리니지’로 대표되는 온라인게임마저 폭발하면서 3년 만에 거대 시장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임 업계에서는 올해가 99년에 이은 두번째 ‘게임 르네상스’의 해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1조원대로 성장한 게임 시장의 규모가 자연스럽게 게임 업체간 분업화, 전문화를 유도하면서 이른바 ‘퍼블리셔’의 등장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국내 게임 시장이 비로소 ‘산업’의 꼴을 갖추게 된다는 얘기다.
또 한편에선 일본의 소니와 닌텐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올해 하반기에 우리나라에서 펼칠 비디오게임 시장 쟁탈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는 세계 게임 시장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할 수도 있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Ⅱ’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국내에서 각각 250만카피라는 경이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박’의 꿈을 현실로 보여준 이 두 게임의 유통업체가 바로 한빛소프트이다.
그런데 이 한빛소프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두가지 있다.
‘한빛소프트는 게임 유통업체’라는 말과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Ⅱ로 먹고산다’는 얘기다.
얼핏 듣기엔 옳은 얘기 같은데 왜 한빛소프트는 이러한 얘기에 치를 떠는 것일까.
한빛쪽의 설명은 이렇다.
우선 ‘유통사=게임 브로커’로 인식되는 국내 현실에서 한빛은 단순한 도소매상이 아닌 기획과 개발, 마케팅과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업체라는 점이다.
또한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Ⅱ 등 대박 타이틀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PC게임 타이틀 판매뿐 아니라 온라인게임과 비디오게임, 캐릭터와 음반사업 등 ‘종합 엔터테인먼트 업체’로 사업영역을 다각화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른바 ‘퍼블리셔’로 거듭나겠다는 얘기다.
너도나도 ‘퍼블리셔’
아직까지 생소하게 들리는 퍼블리셔란 말은 원래 서적 출판을 하는 업체를 일컫는 용어이다.
하지만 게임 분야에서는 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게임 퍼블리셔란 유망한 게임 업체를 발굴해 투자, 육성, 제휴 등을 통해 게임 콘텐츠를 확보하고 이를 다양한 플랫폼과 방식으로 사용자에게 배급, 서비스하는 전문가 집단을 말한다.
단순히 게임을 유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시나리오 구성과 투자, 마케팅과 고객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전담하는 게 퍼블리셔의 역할이다.
따라서 자금력과 기획력, 폭넓은 마케팅 네트워크와 우수한 게임 콘텐츠를 발굴할 수 있는 안목 등을 두루 갖춰야 함은 당연하다.
대형 게임 업체나 대기업이 퍼블리셔로 나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한빛소프트처럼 퍼블리셔를 표방하고 나선 게임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내에서 퍼블리셔 열풍을 이끌고 있는 업체는 PC게임과 온라인게임 분야에서 각각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한빛소프트와 엔씨소프트다.
지난해 말 PC게임 시장에서 48%의 점유율을 보이며 정상을 고수하고 있는 한빛소프트 www.hanbitsoft.co.kr는 PC게임에 치중된 기형적 수익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해 지난해와 올해에 거쳐 헥스플렉스와 커멘조이, 조이임팩트 등 국내 게임 개발업체에 30억원 이상을 투자했다.
또한 올해 2월에는 ‘포스트 리니지 3인방’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온라인 롤플레잉게임 ‘라그하임’의 개발업체 나코인터랙티브의 지분 4.17%를 5억2500만원에 사들였다.
이와 함께 ‘자체 게임 개발 능력이 빈약한 유통업체’라는 비아냥거림을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올해 3종의 온라인게임을 직접 개발해 선보일 예정이다.
한빛소프트 전략기획실 신용식 부장은 “우선 우수한 콘텐츠 확보에 주력해 자체 개발과 게임 개발사 투자, 프로젝트 인큐베이션과 저작권 확보 등 네가지 전략을 바탕으로 게임 퍼블리셔로서 새로운 비전을 달성하겠다”며 게임 퍼블리싱 시장 선점에 대한 자신감을 표시했다.
엔씨소프트 www.ncsoft.co.kr도 이에 질세라 올해 1월 미국의 소니온라인엔터테인먼트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소니의 온라인게임 ‘에버퀘스트’를 한국과 대만, 홍콩지역에 서비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리니지’에 국한됐던 온라인게임 서비스를 퍼블리싱 사업을 통해 다각화하겠다는 전략이다.
3월 초에는 미국 크립틱스튜디오가 개발중인 온라인게임 ‘시티오브히어로’를 전세계에 퍼블리싱한다고 발표하면서 “국내 게임 업체가 해외 게임을 전세계에 퍼블리싱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한빛쪽의 발빠른 행보에 대해 맞불을 놓았다.
엔씨쪽은 “우리의 퍼블리싱 사업은 온라인게임에만 국한된 것이다”고 밝혀, 온라인게임 기반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빛의 다양한 플랫폼 기반 서비스와 차별성을 지닐 것임을 강조했다.
올해 안에 5~6종의 온라인 게임을 퍼블리시할 계획이다.
왜 퍼블리싱인가
퍼블리셔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곳은 한빛소프트나 엔씨소프트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고스톱이나 테트리스, 알까기 등 웹보드게임을 서비스해온 온라인 게임업체들도 퍼블리싱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국내 최초로 퍼블리싱 사업에 진출했다”고 자부하는 넷마블 www.netmarble.net은 경쟁업체인 한게임을 꺾을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으로 퍼블리싱 사업을 선택했다.
나코인터랙티브의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라그하임’을 포함해 모두 4종의 게임을 퍼블리싱하고 있는 넷마블은 퍼블리싱 이후 동시접속자수가 7~10배 가량 증가하는 성과를 보이며 ‘성공한 퍼블리셔’란 평가를 받고 있다.
넷마블은 새로운 게임장르를 발굴하는 데 주력하면서 올해에도 7~10종의 게임을 퍼블리시할 계획이다.
한게임hangame.naver.com도 그동안 ‘퍼니사커’, ‘티위티위’ 등 가벼운 웹보드게임 퍼블리싱에 주력하다 최근 들어 트라이글로우픽처스와 계약을 맺고 3차원 온라인게임 ‘프리스톤테일’의 베타서비스에 들어가면서 퍼블리싱 분야에서 넷마블의 뒤를 쫓고 있다.
대기업의 참여도 눈에 띈다.
삼성전자는 자사의 디지털솔루션센터를 통해 게임 유통사 써니와이엔케이와 공동으로 게임 개발업체 그라비티에 50억원의 프로젝트 투자를 실시하고, 그라비티의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를 퍼블리시하겠다고 지난 2월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그라비티 외에도 조이온, 위즈게이트 등 게임 개발업체와 퍼블리싱 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왜 주요 게임 업체들이 저마다 퍼블리셔를 표방하고 나서는 것일까. 이는 게임 산업의 전문화 또는 분업화로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 게임 업계는 개발업체가 유통까지 책임지는 가내수공업 형태였다.
PC게임 개발업체는 시나리오 구성에서부터 게임엔진 제작과 그래픽 작업까지 도맡아 하고, 게임이 완성되면 총판을 통해 타이틀을 판매하거나 타이틀 유통업체에 맡기는 식의 마케팅을 해왔다.
온라인게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발이 끝나면 서버 구축과 서비스, 커뮤니티 관리에 이르기까지 개발업체가 도맡아 운영해왔다.
그런데 이제 유통과 마케팅, 서비스로부터 개발작업이 분리되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퍼블리셔의 등장으로 개발업체는 마케팅 네트워크나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덜고 양질의 게임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된다.
대부분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국내 게임 개발사로선 안정적 재원을 확보할 수 있고, 퍼블리셔는 우수한 콘텐츠를 확보함으로써 마케팅과 서비스에서 한층 수월한 입장에 서면서 다양한 수익창구를 확보하게 된 ‘윈윈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퍼블리싱 사업은 걸음마 단계에 있다.
역사가 짧아 모범으로 삼을 만한 성공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퍼블리셔를 표방한 엔씨소프트나 한빛소프트, 웹보드게임 업체인 넷마블 등이 모두 “아직까지 국내엔 퍼블리셔라고 내세울 만한 업체나 모델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외국의 경우 일찍부터 제휴와 지분 참여, 프로젝트 투자 등을 통해 개발자와 퍼블리셔가 유기적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세계 3대 퍼블리셔로 꼽히는 EA나 비방디 유니버셜 인터랙티브 퍼블리싱(VUIP),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 인수합병과 지분투자를 통해 게임뿐만 아니라 음반과 영상, 캐릭터 제작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마케팅 네트워크와 개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일례로 비방디는 디아블로 시리즈와 스타크래프트의 개발사인 블리자드를 인수해 롤플레잉과 대전게임 분야를 강화하는 한편, 아케이드게임으로 유명한 시에라 스튜디오와 음반 분야의 유니버셜 뮤직 등을 거느리며 종합 엔터테인먼트 퍼블리싱 그룹으로 위치를 굳히고 있다.
넷마블 장재혁 팀장은 “국내의 경우 초창기에는 게임 공급이 수요보다 적었기 때문에 리니지나 스타크래프트처럼 ‘대박’이 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개발업체와 게임 수가 크게 늘어 이를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앞으로는 마케팅 역량과 재원, 우수 콘텐츠 확보를 바탕으로 퍼블리싱 사업을 선점하는 것이 게임 시장의 성패요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빛소프트 신용식 부장 또한 “국내 게임 업체도 기술과 마케팅 네트워크를 갖춘 기업간 인수합병을 통해 외국 업체에 대항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게임 산업 발전을 위한 업체간 역할 분담을 강조했다.
한빛소프트는 이를 위해 게임 벤처 인큐베이팅 단지를 조성하는 일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불과 3~4년 사이에 1조원대의 시장을 형성한 국내 게임 산업의 저력과 일반인의 게임에 대한 인식 변화, 대형 업체들의 앞선 기술과 서비스 운영능력에다 PC방 중심의 초고속인터넷 인프라 등을 고려하면 외국의 대형 퍼블리셔와 한판 싸움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다본다.
“외국 대형 퍼블리셔가 국내에 진출한다 해도 기존 국내 업체의 탄탄한 마케팅 네트워크를 이용하지 않고는 국내 시장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지난해가 퍼블리싱 사업 진출을 위한 탐색과 준비기간이었다면, 올해는 국내 게임 업체의 제휴와 투자가 결실을 맺으며 본격적인 퍼블리싱 시대를 맞이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엔씨소프트나 한빛소프트를 비롯해 퍼블리셔로 변신을 선언한 국내 업체들의 올해 활동과 성과가 향후 국내 게임 산업에서 퍼블리싱 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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