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오승렬 통일연구원 경제협력연구실장
조동호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팀장
* 일시 : 2002년 7월31일 오후
* 장소 : 본사 회의실강)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가 없는 상황입니다.
한 북한 관리의 표현이긴 한데, 북한은 “토지개혁 이래 최대의 경제개혁 조치”라고 선전한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우선 과연 이번에 알려진 조치들 가운데 어느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시는지부터 얘기를 풀어나가죠. 조) 저는 우선 배급제 얘기부터 꺼내고 싶어요. 북한체제가 변하는 것이냐, 아니면 체제 내에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이냐 논란이 많은데, 그걸 판단하는 데 배급제 변화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강) 정부는 배급제는 폐지된 게 아니다, 이렇게 보고 있죠. 그리고 '조선신보' 보도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배급표를 발급하고 쌀을 구입할 수 있도록 근로자들의 노임을 보장한다”는 명확한 표현이 있죠. 배급제 폐지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이는데. 오) '조선신보'는 아무래도 북한 입장에서 변화가 곧 개혁개방이 아니라는 쪽에 비중을 두는 거겠죠. 저는 굳이 해석을 한다면 배급제가 약간 성격을 좀 달리하면서 축소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취약계층이라든가, 북한 당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배급제가 유지되는데, 다만 과거에는 획일적으로 유지되던 배급시스템이 화폐화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축소된 역할을 하지 않나, 이런 생각입니다.
조) 제가 배급제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배급제를 시스템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급제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이번 조치는 정말 체제 내에서의 개선 성격이 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김) 배급제가 폐지되었느냐 아니냐라는 논란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배급제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보는 편입니다.
과거 일종의 현물임금 방식에서 화폐임금 방식으로 배급제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거죠. 화폐임금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건 여러가지 의미들을 지닐 것 같아요. 왜냐하면 배급제라는 것 자체가 과거에도 단순한 식량분배 제도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거든요. 식량분배 방식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주민통제랄까 노동에 대한 개입이랄까 할 수 있지요. 강) 아무래도 배급제 문제에 관심이 쏠리는 듯한데요. 배급제 문제를 포함해서 이번 조치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제 본격적으로 짚어보죠. 오) 이번에 알려진 변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가격체계 변화와 임금체계 변화를 들 수 있겠죠. 사실 북한 당국은 1992년에도 임금을 대략 40% 이상 인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그 당시하고는 좀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최근의 변화는 매우 종합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지요. 수매가격이나 판매가격의 인상, 화폐임금의 지급 등 표면적인 현상 이면에는 대단히 많은 변화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가장 눈여겨 볼 부분은 이런 거에요. 과거에는 쌀 1Kg당 수매가격이 80전이었는데, 이것을 국영상점에서 배급망을 통해 8전 정도에 팔았죠. 바로 전통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공간의 가격격차 현상입니다.
농업부문의 잉여를 공업부문에 투입해서 공업부문의 발전을 촉진한다, 뭐 이런 거죠. 그런데 이번에 북한 당국은 쌀 수매가격을 1Kg당 40원으로 인상했습니다.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사는 수매가격이 40원이고, 판매가격은 44원입니다.
이 말은 과거처럼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약간의 이문을 남긴다는 의미잖아요. 이건 바꿔 말하면 북한 스스로가 이제는 농업부문의 잉여흡수를 통한 공업부문 발전전략을 어느 정도 수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조치의 의미는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화폐적인 유인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 하나구요, 둘째는 북한 주민들의 선택권은 넓어졌다는 거지요. 인센티브 제공과 선택권 제공, 그리고 농업과 공업부문 발전전략의 변화, 이런 것을 봤을 때 이번 조치는 충분히 평가해줄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김) 현물임금 방식에서는 기업이 생산코스트를 계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잖아요. 그게 이제는 식량가격을 현실화시켰기 때문에 기업의 생산코스트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거죠. 다만 <조선신보> 보도에도 나왔지만, 가격현실화를 하면서 식량가격 자체가 모든 가격의 기준이 된 건 주목해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식량가격이 다른 가격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인디케이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조) 저도 앞에서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대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뒤에서 할 얘기를 앞당겨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번 조치가 북한 나름의 경제발전 전략이 아닌가 싶어요. 경제발전이라는 건 결국 생산요소의 투입을 늘려야 하는 것이거든요, 자본이나 노동이 늘어나건, 기술진보가 있건 말이죠. 그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마찬가집니다.
북한을 한번 봅시다.
노동은 한정되어 있고 자본은 부족하니까 외국에 의존하려고 했는데, 이게 제대로 안 됐거든요. 결국 남은 건 기술뿐이었죠. 새로운 사고라든가 과학기술 중시라든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상황이니까 결국 이번 조치가 나온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강) 이쯤에서 논점을 좀 정리해야 할 듯한데요. 배급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에서 배급제가 그동안 실제로 어떻게 유지되어왔는가 하는 것과 북한의 공식적인 체제로서의 측면을 나누어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현실과 체제와의 괴리를 어떻게 보완하느냐라는 문제 말입니다.
또 하나. 과거에는 국가보조 부분에 대한 재정부담이 있었는데, 이제는 국가가 자기수익을 챙기거나, 배급에 따른 비용 부분을 국가재정에서 추가로 부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측면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 40원에 구매해서 44원에 판매할 때, 그 4원이라는 의미는 일종의 관리비용입니다.
어차피 수매체계를 유지하려면 행정적 비용이 필요한 거니까요. 그런데 재정과 관련하여 볼 때, 보조금을 폐지한 건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봐요. 하나는 재정적자를 완화시키겠다는 것, 두번째는 실질적인 독립채산제를 비롯해 여러가지 인센티브 효과를 발휘하겠다는 거죠. 그렇다고 실제로 재정흑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강) 그걸 노리는 건 아니겠죠. 김) 물론이죠. 왜나하면 수매가격과 임금 인상을 했고, 원자재라든가 중간재 가격도 모두 현실화했기 때문에 수매가격과 판매가격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것이지 재정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게다가 사회주의 사회에서 일단 개혁이 시작되면 적자재정이 되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데 도시주민들의 생활안정을 이뤄줘야 하니까. 또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공급 자체가 불안정하고 부족하다는 걸 전제로 한다면 암시장에서의 물가폭등 같은 걸 경험할 테고, 결국 정부지출도 거기에 연동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겠죠. 재정흑자보다는 재정적자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그런 시스템 말입니다.
강) 배급제와 관련해 또 하나 얘기할 게 있습니다.
과거에 도시노동자의 생계비용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식량에 대한 지원체제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이른바 이중가격제라는 게 자본주의 체제에도 있었고, 또 우리 정부의 60년대 개발전략 자체도 그런 것 아닙니까. 결국 이번 조치는 이런 이중가격제를 포기한 걸로 볼 수 있잖아요. 근로자들의 부담이 늘어난 측면도 분명히 있을 테고. 오) 근로자들의 부담이 늘어난 것은 사실인데, 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이번 조치의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이번에 임금과 가격을 정상화해서 암시장을 공식화했다는 것은 암시장을 찾던 수요를 국영상점으로 돌린다는 수요측면에서의 의미도 있겠지만, 근로자들의 근로의욕, 즉 공급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도 되죠. 그래서 저는 이번 조치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렇게 봅니다.
물론 가장 크게는 공식부문으로 암시장 흡수, 제도화 이런 게 있겠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얘기할 수 없는 게 있어요. 효율성의 계산과 제고라는 또다른 목적이 자리잡고 있다는 거죠. 효율성의 계산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과거에는 사실은 식량가격을 아주 낮게 책정해서 임금도 역시 싸게 주고 결국에는 물적 잉여를 축적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물적 잉여죠, 화폐 잉여가 아니라. 물적 잉여라는 것은 근로 인센티브가 분명히 존재할 때는 효율적인 방법이 되지만, 근로의욕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파악할 방법이 없는 거죠. 이제는 과거에 측정하기가 어려웠던 잉여 부분이라든가 효율성 지표를 화폐단위로 환산할 수 있게 됐다는 말입니다.
아직 시장경제에 다가갔가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적어도 상품경제의 개념에서는 북한이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지 않나 봅니다.
강) 가령 배급표를 발급받고 쌀을 구입한다고 합시다.
임금인상으로 돈이 있더라도 곧바로 물건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장마당에서 북한 원화의 화폐가치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북한 주민들이 이번 조치로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저는 그게 큰 의문이에요. 김) 제일 중요한 조건이 공급능력 아니겠어요? 강) 공급능력은 지금 바뀐 게 전혀 없잖아요. 배급표를 발급받고 쌀을 구입할 수 있도록 근로자들의 임금을 보장한 건데, 배급표 없는 사람들 경우에는 장마당에 가서 구입할 거 아니에요. 김)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가 얼마만큼의 공급능력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건데요. 이번에 발표된 것을 계속 유지하려면 그에 걸맞는 공급능력이 있어야 하죠. 하지만 객관적인 사정상 북한의 식량수급에는 절대적인 부족량이 있고, 또 기존의 비공식 부문으로 유출되는 것도 있고 해서 여전히 공급의 불안정성은 존재하겠죠. 그런데 공급의 불안정성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문제는 뭐냐 하면 어차피 국영배급소에서 식량을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암시장으로 가야 하는데, 암시장에서는 초과수요가 있단 말이죠. 가격현실화 이전에 암시장 쌀가격이 1Kg에 150원, 200원 했다면 지금은 아마 1500원, 2000원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겠죠. 공급이 제대로 안 되면 임금상승 효과나 식량가격 현실화의 의미들이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때 과연 북한 당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뭘까도 생각해 봐야죠. 지금은 임금과 식량가격을 국가가격제정국에서 제정하는데, 공급의 불안정성을 고려하면 가격탄력성을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 중요한 과제죠. 조) 이번 조치를 보고 처음 떠오른 건 자신감이라는 단어에요. 북한 당국이 공급능력과 관련해 참 자신감을 갖고 있구나 하는. 그동안에는 정부가 능력이 없으니까 공급 배급망이 무너지는 걸 그대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이거죠. 이 시스템을 가지고 어쨌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쪽에서 유통되는 물자, 그쪽에서 남는 잉여를 공식부문으로 흡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식가격을 암시장가격 수준으로 올려서 비공식부문에서 경제활동하던 인센티브를 줄여야 하잖아요. 문제는 북한 당국이 이런 조치를 했다는 건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다는 거죠. 농업부문이건 제조업부문이건 새로운 인센티브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들어서 공식부문에서의 생산효율을 증대시키면 공급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겠다, 이런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다는 거죠. 임금인상도 그렇습니다.
임금을 올려주는데 그건 결국 재정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거든요. 재정에서 나가려면 결국 세입이 있어야 하는 거고 세입이 있으려면 뭔가 공식부문에서 돈이 들어와야 하죠. 그게 아니면 통화량을 늘려 메꾸어야 하는데 그건 바로 초인플레이션이거든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북한 정부가 이번 조치를 취했다는 건 자신감이 깔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오) 저는 이번 조치 자체가 효율성 향상을 위한 인센티브라는 기능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고 봐요. 일단 공식부문 경제라는 게 생산과 직결되어 있다는 말이죠, 과거의 암시장이라는 건 시장기능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사실 생산과는 동떨어진 측면이 있거든요. 유통과 관련되는 거란 말이죠. 사실 그동안 북한 원화는 화폐로서 기능을 거의 못했습니다.
쌀이 암시장에서 화폐로서 기능한 측면도 있어요. 암시장과 공식경제의 이중화 현상 때문에 북한에서 사장되는 식량이라든가 소비재가 상당히 많았다고 봐요. 배급권이 주어지는 특권계층은 자기가 먹기 위해서 쌀을 사는 게 아니라 가치축적 수단으로서 보관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이번 조치로 적어도 쌀의 화폐화 기능을 막을 수는 있겠죠. 다른 동기 때문에 사장되는 식량들이 이제는 소비 목적으로 쓰여질 수 있고, 또 이건 바로 생산행위와 연결이 됩니다.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죠. 강) 북한경제의 핵심적인 관리원칙이 바뀐 거라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껏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또 이번에는 다른 가격들이 모두 다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수매가격을 올린다고 해서 농민들에게 혜택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 정도로 인센티브가 될지도 의문입니다.
김) 과거에도 공장에서 차등임금제가 있었습니다.
도급제라는 게 일종의 차등임금제 아닌가요. 다만 현물임금제였기 때문에 화폐의 미묘한 차이라는 게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단 말이죠. 하지만 화폐임금제 아래서는 그 차이가 상당한 의미를 지닙니다.
상당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죠. 오) 과거에는 물적 관리 시스템이었다면 이제는 화폐적 관리 시스템으로 넘어간다는 거죠. 제가 아까 이번 조치가 상당히 종합적 성격을 띤다고 그랬는데, 물적 관리시스템에서 화폐적 관리 시스템으로 넘어가면서 종합적인 시스템 자체의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물적 관리 시스템에서는 중앙에서부터 말단 생산조직까지 획일화된 네트워크가 반드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화폐적 관리 시스템으로 넘어간다는 건 생산조직이나 지방단위에게 자율권을 확대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적 통제수단은 대단히 단순한 데 비해 화폐적 통제수단은 간접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단 말이죠. 결국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시장지향적 개혁이란 표현을 절대 쓰지 않지만, 내부에서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보면 이제는 상품경제에서 활용하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많이 도입하고 있다고 봅니다.
조) 저는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사례를 통해 얘기를 풀어 보고 싶습니다.
중국, 베트남은 물론이고 동구권 국가들도 계속 개혁을 해왔잖습니까. 이번 조치의 내용을 보면 헝가리가 68년에 신경제계획을 내세우면서 취했던 조치들과 상당히 유사해요. 물론 헝가리의 경우가 훨씬 광범위하긴 하지만요. 근데 헝가리는 실패를 하거든요. 왜냐?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격을 현실화하고 기업에 자율권을 줘서 수요공급을 반영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앙의 감독과 통제를 받아왔거든요. 이런 메커니즘은 제대로 안 굴러가죠. 왜냐, 시장이 정한 게 아니거든요. 가격이란 게 어쨌거나 시장가격이 아니고 시장가격을 나름대로 파악해서 결정한 국정가격이란 말입니다.
어차피 관리가격인 이상 현실가격과 괴리가 생기고, 또 이를 보완하려면 더 많은 자율권을 줘야 하고, 뭐 이런 게 되풀이되거든요. 이러다가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가면 체제와 충돌하는 거죠. 계획경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두번째 요인은 오일쇼크에요. 말하자면 외부요인이죠. 오일쇼크로 원자재 공급이 딱 막히니까 모든 게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강) 그간 북한 경제체제가 나름대로 개혁과 개방조치들을 일부나마 진행해왔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조치의 성격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김) 북한은 이번 조치를 경제관리 개선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아요. 그간 나온 문건이나 보도를 보면 말이죠. 근런데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라는 게 지금까지 북한이 자신들의 경제체제라고 규정해왔던 것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는 게 사실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다르죠. 다만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격 규정하는데는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 같아요. 그것은 북한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 개혁과정의 일반적 현상이죠. 중국의 경험을 봐도 잘 알 수 있구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현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지금 북한이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한다거나 집단주의 우월성을 얘기하는 건 정책 현실과는 무관하게 당분간 진행될 거라고 봐요. 강) 북한이 나름대로 북한체제의 개선 과정에서 취했던 여러 조치의 측면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번 조치가 그들이 유지해왔던 계획경제의 틀을 벗어나서 시장경제적 요소들까지 감안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건가요? 김) 내용적으로는 그렇다고 봅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기존 틀을 유지하겠지만. 조)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인데요. 이번 조치를 그동안 제대로 작용하고 있지 않던 계획경제를 제대로 작동시키겠다, 물적 지표를 가지고 하던 것을 화폐를 가지고 하겠다,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칩시다.
저는 그 정도만으로는 계획경제 근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북한 당국은 이번 조치 정도를 취하더라도 내부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는 편입니다.
북한 당국은 추가적 성장을 위해서 추가적 자본이 필요하니까 외부에 의존하려고 했던 거고, 개혁보다는 오히려 개방에 무게를 둔 모습을 보여왔단 말이죠.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가 아주 안 좋아지고 개방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생기다 보니, 이번에는 내부적 개혁쪽으로 방향을 튼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개혁조치라고 하는 것의 목적은 허물어졌던 계획경제를 제대로 추스르겠다는 거지요. 가격, 임금, 환율의 현실화 정도요. 생산 인센티브를 조금 제고시키고 말입니다.
강) 제가 이번 조치를 보고 의아스러운 게 또하나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약간 혼란스러운 듯한 인상을 주는 반면, 대외적으로만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가령 <조선신보>를 통해 이야기한다든지, 국제식량기구 평양대표한테 이야기한다든지 말이죠. 김) 문제는 이번에 알려진 개혁의 폭이라는 게 생각보다 크다는 데 있다고 봐요. 외부자인 우리 기준에서는 여전히 미흡하고 초보적인 것이지만. 북한의 기존 시스템에서 봤을 때는 대단히 큰 폭의 개혁일 수 있다는 거죠. 내부적인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정당성 논리를 어떤 식으로 제시할지에 대해 아직 확실한 방침이 서지 않아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우를 봐도 개방정책보다 개혁정책이 더 어렵거든요. 개방은 개혁보다 손쉬운 정책선택인 측면이 있어요. 오) 이번 조치가 중국 개혁개방 초기 현상과 흡사하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화폐적 관리라든가 상품경제를 일부 도입하는 것 등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것 자체만 가지고 중국의 경험과 유사하다고 단정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이번 조치와 중국 경우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겁니다.
중국에서는 계획이 축소되면서 가격자유화가 그 공백을 메웠습니다.
앞으로 북한 국가가격제정국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켜봐야 하지만, 아직 가격자유화 조치까지 가지는 못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구요. 또 중국은 소비재 가격자유화뿐 아니라 생산원자재, 중간재 시장 양성에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반면 북한은 중간재에 대해 시장거래적 성격을 부여하는 데 굉장히 주저하고 있습니다.
또 중국은 79년부터 경제특구 건설을 확실히 추진했습니다.
홍콩, 대만을 겨냥한 정책이 초기부터 상당히 구체적으로 시행된 거죠. 하지만 북한이 이번 조치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데, 남쪽에 대해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접근방식과 구체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동안 북한이 취해왔던 개혁개방 조치들과 이번 조치가 어떻게 연결되느냐 문제가 남는데요. 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보고 있습니다.
합영법이나 나진·선봉이 새로운 경제정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최근의 변화하고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거죠. 합영법이나 나진·선봉은 북한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외국자본을 활용하거나 나진·선봉 한 지역을 활용해 특구로 밀고나가겠다는 것도 얘기할 수 있구요, 무엇보다 정치배경에서도 분명히 다릅니다.
결정적인 건 이건 김정일 시대의 정책노선이라는 점입니다.
나진·선봉은 김일성 시대의 정책이라는 한계가 있는데, 98년 이후의 정책과 이번 정책을 합쳐서 보면 김정일 시대의 경제노선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부여할 수 있지요. 이번 조치는 북한의 관리 시스템, 그야말로 물적 통제 시스템에서 화폐관리 시스템으로 넘어간다는 것이죠.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거죠. 운영 메커니즘 자체를 바꿨다는 말입니다.
김) 이번 조치는 사실은 잠정개혁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일시적인 가격현실화를 통해서 암시장과 공적 영역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거죠. 앞으로 다양한 파급효과가 있을 것 같아요.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가격탄력성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 것도 중요할 테고. 재정적자 문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죠. 그게 발생했을 때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일종의 소득세 같은 걸 도입해야 할 거로 봅니다.
대외여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북한이 어느 정도 거시경제를 안정화해나가야만 훨씬 더 민감한 부분의 개혁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인데, 생산의 정상화나 공장가동률의 정상화 같은 경우에도 역시 외부공급이 중요한데, 문제는 이게 중국과 베트남과 달리 국제적인 긴장 속에서 정책변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거든요. 이 점에서 본다면 중국이나 베트남보다는 미국의 경제 제재 속에서 변화를 시도했던 쿠바 사례가 오히려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쿠바 사례에서는 미국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캐나다, 스페인, 멕시코로부터의 투자가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공장가동률 높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습니다.
북한의 경우 이런 역할은 남한이 맡아야 할 것 같고, 그렇게 본다면 남한의 대북정책이 매우 중요하겠죠. 강) 마지막으로 과연 북한은 변화의 길에 접어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짧게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아쉽지만 이 자리를 정리했으면 합니다.
김)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장개혁을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라 하죠. 저는 북한이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건 분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아직 달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언제라도 내릴 수 있다는 거죠. 북한 당국은 지금 중간에 내릴 것인가 아니면 호랑이가 달리게 할 것인가의 고민을 하고 있어요. 문제는 뭔지 아세요. 그건 북한 사회가 고민하는 동안 호랑이가 하염없이 기다려주진 않는다는 거죠. 조) 그 말을 받아서 말하겠습니다.
저는 호랑이등에 올라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기 호랑이가 있는데 타건 안 타건 간에 앞으로 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내 체력을 좀더 키워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라고 봅니다.
북한 내부적으로 본다면 지금껏 보지 못한 큰 변화이기는 하지만, 우선은 ‘내 체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정도의 판단 아닐까요. 호랑이를 타건 안 타건, 아니 호랑이가 아니라 말을 타더라도 어쨌든 체력은 필요하니 말이죠.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동안 너무 어려웠으니까 펀더멘털을 다지는 중이라고 봅니다.
오) 변화는 확실히 시작됐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지금 취해진 단편적 조치들을 보완하기 위한 후속 조치들이 계속 이어지리라고 봅니다.
다만 그런 조치들이 과연 북한 당국이 기대하는 소기의 성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북한이 갖고 있는 제약조건이 너무나 많고, 외부환경도 아직은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죠. 앞으로 상당히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겁니다.
남쪽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겠죠. 강) 아쉽지만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귀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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