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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리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다
[서평] 파리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다
  • 신현호/ 홍익대 강사
  • 승인 2003.01.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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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솟아오른 불모의 화산섬은 다양한 동식물이 순차적으로 도래해 하나의 독립된 생태계를 이룬다.
부패가 진행중인 시체는 바로 이러한 화산섬과 비슷한 것이다.
시체는 들, 연못, 건물 안 어디에 놓이든지, 화산섬과 마찬가지로 그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상당히 독립된 생태자원으로 기능한다.


인간과 동물의 사체를 찾아 정신없이 헤매는 금파리와 쉬파리는 사망 후 대개 10분 안에 ‘현장’에 도착해 시신을 먹으면서 알을 깐다.
이 알은 곧 구더기가 되고, 번데기가 되고, 마침내 성충 파리가 된다.
물론 파리만이 아니다.
시신을 직접 영양원으로 삼는 많은 곤충들이 자신의 기호에 따라 사망 직후부터 시체가 건조해져가는 시기 사이에 몰려든다.
이처럼 파리의 알과 구더기가 시신에 가득 차게 되면, 그 다음엔 이들 파리의 알과 구더기를 먹고사는 딱정벌레들과, 구더기와 번데기에 알을 낳는 말벌도 찾아온다.


몇몇 파리 종(種)은 시신과 다른 곤충의 알, 모두를 먹는 잡식성이기도 하다.
시신이 뼈만 남기게 되면, 거미가 뼈에 거미줄을 치고, 불개미나 말벌이 두개골 안에 군락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신 위에서 번성하는 곤충과 절지동물들의 이 독특한 생태계는 그 자체로서 매우 규칙적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생태계를 세심하게 조사하고 분석해 들어가면, 그 생태계의 원천인 시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법곤충학자다.



실제 사건 토대로 추리소설처럼 그려내


1980년대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분야는 최근 미국 사법당국과 법원이 그 분석력을 인정하면서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그 선두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하와이 대학의 곤충학자 M. 리 고프다.
그는 곤충학자로서는 최초로 법정에서 전문가 증언을 했고, 곤충학자로서는 유일한 미국 법의관학회 회원이다.
곤충학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법과학학회의 병리학·생물학분과 회장을 역임한 것도 그의 몫이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수많은 살인사건의 현장감식에 참여했고, 사망시간, 사망장소, 사망원인, 마약복용 여부 등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다.
그가 자신과 동료들의 20년 경험을 집대성해 선보인 역작이 바로 '파리가 잡은 범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매우 성실하고 치밀한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는 미국에서 벌어진 실제 살인 사건들을 사례로 삼아서, 법곤충학이 어떻게 현장의 곤충과 절지동물로부터 정보를 얻는지를 생생하고 실감나게 그려낸다.
평상시에 법곤충학자들이 사건 현장의 정보를 분석하기 위한 분석틀을 갖추기 위해서 얼마나 다양하고 힘든 실험을 하는지도 이 책엔 잘 나타나 있다.
생물학, 곤충학, 해부학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그의 명쾌한 문장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없이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이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연구실을 나와서 범죄 현장과 법정에까지 이르게 된 과학자가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고프는 도중에 만나는, 궤변을 늘어놓는 변호사들과 경직된 관료들을 맘껏 조롱하는데, 이 대목에서도 위트가 넘친다.
리바이스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샌들을 신고 그리고 무엇보다 왼쪽 귀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끼고 FBI 아카데미에 강연하러 나타나서 FBI 요원들을 당황하게 한, 이 좌충우돌 과학자의 에피소드는 곤충과 살인사건이라는 심각한 주제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양념이다.
언젠가 그가 오래된 시신 밑의 토양을 채취해서 분석기에 걸어두었는데, 배기관 확인을 잘못해 대학 건물 전체를 시신이 부패하는 악취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든가, 법과학학회 회원들에게 구더기 채취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1천마리의 구더기를 준비해두었는데 라스베이거스호텔 직원들이 그만 보관을 잘못해 모두 파리 성충이 되어서 호텔 무도회장에 파리 1천마리가 날아오르는 장관을 연출했다든가 따위의 에피소드들.

사실 법과학은 이제 일반인들한테도 전혀 생소한 분야가 아니다.
대표적 예로는 법심리학자들을 꼽을 수 있다.
영화는 언제나 이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카피캣'의 시고니 위버, '키스 더 걸'의 모건 프리먼, 'Hannibal Lecter Trilogy'의 앤서니 홉킨스를 보라. 하지만 그밖에도 법인류학자, 법치의학자를 포함해 물리학-화학-생물학 전문가들이 범죄수사에서 보여주는 활약상은 대단한 관심을 끌고 있다.
몇달 전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는 “어떻게 과학이 범죄를 해결하는가”였다.
어디 이뿐인가. 한국과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연속극 'Criminal Scene Invesgation'은 범죄를 추적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우리는 법인류학자가 두개골을 들여다보면서 ‘음, 피해자는 십대 초반의 소년으로, 몽골로이드이고 약간의 코커서스인의 혈통을 포함하고 있군’이라고 추정하는 모습이라던가, 법심리학자들이 ‘여성을 죽이고 입 속에 나방을 넣는 연쇄살인범은 여성으로 변신하고픈 남성 사이코’라고 추정하는 것 따위에 어느새인가 익숙해져 있다(물론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성전환을 하려는 모든 사람이 다 정신이상인 것은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시신 위를 들끓는 그 구더기들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줄 줄이야.

고프는 비록 자신의 책에서 개인적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아마도 수많은 책과 영화를 접한, 문화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고프와 그의 동료들이 속한 학회는 미국 법곤충학회다.
이들은 늘 아침에 모여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구더기가 들끓는 시신의 사진을 수십장씩 돌려본다고 한다.
그 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요건 중 하나가 바로 그래도 밥맛을 잃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를 “더티 다스”(Dirty Dozen)라 부른다고 한다.
아마도 찰스 브론슨 주연의 '더 더티 다스'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한가지 더. 이 책의 원제는 'A Fly for the Prosecution'인데 이것은 물론 아가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추리소설 'Witness for the Prosecution'에서 빌려온 것임에 틀림없다.



전문지식 없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


한국어판 번역은 저명한 법의학자 황적준의 몫이었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술술 읽히는 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원본에는 틀림없이 있었을 색인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건 독자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한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물론 불가피한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forensic-’라는 단어를 ‘법-’로 번역하는 것도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법의학, 법심리학, 법치의학 등으로 번역하는 게 굳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 forensic이란 용어는 ‘법’이라기보다는 ‘수사’라고 번역하는 게 더 그럴듯해 보인다.
수사의학, 수사심리학, 수사치의학, 수사곤충학 이런 식으로. 앞에서 얘기한 온갖 수사과학(forensic sciences)들을 굳이 강의한다면 법대보다는 경찰대학쪽이 더 적절해 보인다.
물론 이것도 법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겠지만, 그래도 법의 한갈래라고 보기는 무리다.
법경제학이나 법문학처럼, 법의 한 분야인 신생 학문들은 모두 law and economics나 law and literature처럼 forensic이 아닌 law라는 영어 단어의 번역어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뭐냐고? 일단 이 책은 전문지식 없이도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재미있다.
그리고 재치 넘치는 독자들이 이 책을 꼼꼼이 읽어둔다면 칵테일 파티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흥미로운 에피소드 몇개쯤은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 한가지. 이 책을 화제로 삼을 때는 분위기와 상대를 잘 가리도록. 살인과 시체와 구더기를 화제로 삼는 것을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믿는 지루한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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