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따지면 금융감독원에 해당하는 증권거래위원회(SEC) 윌리엄 도널드슨 의장이 취임한 지 두달 만에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고 있는 미국 금융시장을 수술하기 위해 메스를 꺼내들었다.
첫번째 수술 대상이 되는 ‘영광’은 베일에 가린 세계금융의 주역 ‘헤지펀드’가 차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도널드슨 의장은 최근 운용과정과 자산 건전성에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헤지펀드 문제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채 놓아두기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면서 거의 규제가 없는 헤지펀드업종에 새로운 감독원칙을 세울 것임을 시사했다.
미국 정부는 사설 투자펀드인 헤지펀드들에 대해 사실상 아무런 제도도 마련하지 않고 방치해왔다.
이번에 도널드슨 의장이 가시적 조처를 취한다면, 이는 사실상 1998년 롱텀캐피털 이후 미국 금융 역사상 두번째로 헤지펀드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이다.
증권거래위원회의 구체적 헤지펀드 규제 방법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일단 가장 낮은 수위로 펀드와 펀드매니저들을 증권거래위원회에 등록하도록 하는 방안이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다.
여기다 헤지펀드의 운용자산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증권거래위원회 조사 결과, 헤지펀드가 얼마나 많은 자산을 갖고 있는지조차 조사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
위험 숨기고 수익률 부풀리기 횡행
최근 몇년간 헤지펀드들은 주식시장 약세에도 나름대로 수익률을 올리며 높은 인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운용의 투명성이나 위험 정도에 대해 신뢰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는 지적이 금융권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제기됐다.
주로 제기되는 문제점은 헤지펀드가 정통 펀드라고 할 수 있는 뮤추얼펀드에 견줘 규제를 거의 받지 않기 때문에 수익률 산정이 모호하고 부풀려지는 사례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헤지펀드는 펀드 자산과 실적에 대해 감사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투자하고 있는 자산 가운데 일부는 가치평가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레버리지 투자는 헤지펀드의 위험성과 수익성 부풀리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상당수 헤지펀드는 펀드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차입해 원래 자산 위에 얹어 2배의 투자금을 마련해 투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수익률이 두배로 부풀려진다.
물론 위험도 두배만큼 커지지만, 위험이 크다는 사실은 높은 수익률 뒤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최근 헤지펀드들이 주식시장이나 외환시장에서 다양한 투자대상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수익률 평가는 더 복잡해지고 불투명성은 높아졌다는 게 증권거래위원회쪽의 시각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주택담보부채권(모기지 채권), 전환사채, 부동산 등은 일부 헤지펀드에 단기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안겨다주기도 했지만, 투자대상이 복잡해지고 위험성도 커져 뮤추얼펀드와 직접 수익률 비교가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비콘힐 사건’이 터지면서 헤지펀드의 불투명성 문제가 불거져나오기도 했다.
헤지펀드회사 비콘힐에셋매니지먼트는 주택저당금융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고도 이를 숨겼다.
비콘힐은 지난해 8월초부터 큰 손실을 입었지만 이를 투자자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10월초에 가서야 펀드가 25%의 손실을 입었다고 알렸다.
비콘힐은 9월에도 자사의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스톨펀드의 자산가치가 7억5600만달러라고 투자자들에게 통보했으나 당시 실제 펀드가치는 2억6천만달러도 되지 않았다.
결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이 회사에 대해 사기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세계적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조차 헤지펀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7월 헤지펀드인 랜서펀드에 1560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런데 올해 1월 한푼도 건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를 전액 상각처리해버렸다.
헤지펀드가 투자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게 모건스탠리쪽의 얘기다.
랜서펀드는 적정주가를 판단하기 곤란한 소형주에 주로 투자했다.
또 투자한 기업들에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담보를 잡기도 했지만 담보가치를 평가하기도 곤란했다는 것이다.
40% 이상 감사받은 사실 공개 안해
헤지펀드들이 좋아하는 전환사채는 주식과 채권 성격을 모두 갖고 있어 가치를 계산하기가 어려워 위험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비상장기업이나 부동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엔론 등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 기업들의 채권을 투기적으로 사들이는 펀드들도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 빙 리앙 교수는, 헤지펀드의 40% 이상은 펀드 감사를 받은 사실을 투자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정보가 제한돼 제대로 감사를 할 수 없었던 펀드도 부지기수였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를 내놓아 논란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여기다 투자자문사 트레몬트어드바이저스는 지난해 헤지펀드 14%가 문을 닫았고, 최근 몇년 동안의 평균도 10%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뮤추얼펀드의 청산율이 연간 4% 정도인 것에 견주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갑자기 펀드가 청산돼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위험에까지 노출돼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헤지펀드에 투자하는 대중적 펀드들이 나오면서, 헤지펀드 문제는 소수의 거액 투자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수 개인 투자자들에게 관련된 문제로 바뀌었다.
뉴욕주 검찰도 문제가 생긴 헤지펀드 펀드매니저들을 적극적으로 기소하면서 문제를 드러냈다.
사실 헤지펀드에 대한 수술은 전임 하비 피트 의장이 있을 때부터 증권거래위원회의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곤 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신임 의장이 선임되면서 힘을 받기 시작할 전망이다.
전세계 증권시장 질서의 표준을 제공하는 ‘월스트리트의 경찰’ 증권거래위원회 새 우두머리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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