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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배째라’ 심보에 ‘법대로’ 정신 실종
[기획연재] ‘배째라’ 심보에 ‘법대로’ 정신 실종
  • 이원재 기자
  • 승인 2003.04.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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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참여자 도덕적 해이, 정부 봐주기 일관…총체적 ‘부실 시스템’ 연구과제

4월3일 오전 투신협회에서는 투신운용사 사장단 긴급 회의가 열렸다.
정부가 카드사 유동성 지원을 위해 6월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투신권 보유 카드채 중 절반(5조원 규모)에 대해 만기연장을 해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였다.
예전의 투신권 같았으면 아마 정부의 ‘통보’에 대해 자율결의 형식으로 ‘적극 협조’를 다짐하는 형식적 자리가 됐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례적으로’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 외국계 투신운용사 사장들을 중심으로 카드채 만기연장을 해주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반대하는 논리는 아주 단순하고 원론적이었다.
시장논리에 반대되는 논리로 고객들에게 손해가 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예를 들면 프랭클린템플턴투신운용의 입장은 이랬다.
“SK글로벌 문제가 터지자마자 머니마켓펀드(MMF)에 대한 투자자들의 환매 요청이 몰렸지만 처음엔 채권이 팔리지 않아 환매를 해주지 않았다.
편법으로 미매각 채권 부담을 떠안고 돈부터 내준 은행·증권계열 운용사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결국 아예 MMF를 폐쇄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우고 차례로 공정하게 환매를 해주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서 카드채 만기연장을 해줘버리면 다시 환매계획이 틀어져버린다.
투자자들에게 더이상 할 말이 없어져버린다.


즉 어렵사리 시장논리에 맞게 수익증권을 팔아 고객들의 자산을 지켜주고 있는데, 여기에 시장 외적 논리가 개입하면 다시 상황이 어그러지게 되니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다른 외국계 운용사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러나 금융당국쪽에서는 ‘금융시장이 무너지면 외국계라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원칙 지키려는 외국계 기업 ‘왕따’ 취급

분명히 한국 금융시장은 ‘시장’이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시장은 SK글로벌 분식회계나 카드사들의 급작스러운 경영악화 등 돌발적인 악재에 대해, 위기의 확산을 막고 충격을 흡수하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외환위기 때에도, 대우사태 때에도, 이번의 두가지 악재에 대해서도 한국 금융시장은 가장 먼저 흔들리며 위기감을 조성하는 원흉인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위기감을 확산시키며 증폭시키는 것 같아 보이곤 한다.
어쩌다 금융시장은 외국계 운용사들처럼 우직하게 시장 규칙을 지키겠다는 참여자들이 오히려 ‘왕따’ 취급을 받게 되는 시장이 돼버렸을까?

우리 시장의 수준은 최근 일어난 머니마켓펀드 환매사태를 찬찬히 뜯어보면 좀더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SK글로벌 분식회계 문제와 카드채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기업이나 금융사 등 투자자들은 일단 자신들이 펀드를 사들인 증권사나 은행으로 가서 환매를 요청했다.
펀드 수익률도 애초 채권 만기 보유 때 예상수익률로 맞춰달라고 떼를 썼다.


증권사나 은행들은 곤란한 처지였다.
이미 SK글로벌이나 카드채는 시장에서 전혀 거래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환매해주지 않았다가는 투자자들이 떨어져나갈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일단 돈부터 돌려줬다.
수익률 역시 마찬가지 논리에서 맞춰서 내줬다.


국고채와 통안채 등 우량채와 카드채를 함께 편입해 둔 일부 투신사에서는 그 환
매대금을 내주기 위해 우량채를 먼저 팔아치웠다.
그 돈으로 먼저 찾아온 투자자들에게 돈을 내줬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 그들의 펀드는 돈은 빠져나가고 거래되지 않는 채권만 잔뜩 떠안고 있는 꼴이 돼버렸다.
증권사와 투신사들은 이렇게 거래되지 않는 채권을 잔뜩 떠안고는 정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채권안정기금을 만들어 투신권의 카드채를 사달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금융시장의 분위기를 알고 있는 카드회사들은 부실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고금리의 채권을 발행하고 신용위험을 정밀하게 측정하지도 않은 채 현금서비스를 남발했다.
그러고는 강도 높은 자구노력으로 경영부실에 책임을 지는 대신 일단 정부와 금융권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지원대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 증권사 분석가는 “정부가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문제를 풀어줄 것 같으니까 카드사들이 자구 노력 대신 ‘버티기 작전’을 벌인 것 같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틈만 나면 ‘시장 원리’ ‘시장 개혁’을 외치는 정부가 다시 한번 나섰다.
은행들의 ‘협조’를 구해 5조원을 투입해 6월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투신권 보유 카드채의 절반을 사들여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장 원리’와 ‘법대로’ 정신은 아무 데도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시장 원리를 곧이 곧대로 따랐다면, 먼저 찾아온 투자자에게 환매대금을 내주기 위해 우량채를 먼저 팔아버리고 안 팔리는 채권만 떠안고 있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성철현 LG투자증권 채권트레이딩팀장은 “이런 내막을 알고 보면, 시장 참가자 누구도 ‘도덕적 해이’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법인 투자자들은 엄연한 ‘투자’인 머니마켓펀드 가입을 ‘이자가 높은 예금’ 정도로 여겼다.
매일 펀드의 보유자산 내역을 보고받는 이들이 위험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채권이 편입됐는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가만 있다가 문제가 터지고서야 이자를 보장해 환매를 해달라고 판매사에 요구하는 것은, 수익은 챙기되 위험부담은 지지 않겠다는 도덕적 해이에 가깝다는 것이다.


증권사와 투신사들도 마찬가지다.
당장 투자자들이 등질까 두려워 일단 돈부터 내주고 나중에 잔뜩 떠안은 채권을 정부에게 해결해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은 당연히 도덕적 해이다.
물론 자신들의 잘못된 경영 때문에 난장판이 된 금융시장 앞에서 눈치만 살피면서 지원만 기다리고 있는 카드사들의 모습도 도덕적 해이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시장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금융시장에 어려움이 올 때마다 분명하게 개입하겠다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원에게도 비슷한 의미에서 책임이 있다.
어느 정도 선에서 개입해 어느 정도나 도와주겠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 참여자들이 ‘부적절한 기대’를 갖고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법 규정을 어기면서 미매각 환매를 해준 증권사·투신사들에게까지 지원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 많다.


사실 기업의 경영이 어려워져서 위험이 커진다면, 그만큼 주식이나 채권의 가격을 떨어뜨려 거래시키면서 충격을 흡수하는 게 제대로 된 시장의 모습이다.
그런데 특히 채권시장에서 그런 시장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어딘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멍을 만드는 시장 참여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일종의 문화다.
그러나 문화는 항상 그 문화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도덕적 해이를 쉽게 용인하는 금융시장 문화는 크게 리스크 평가 기능의 부재, 정보의 불균형, 대형 위험선호 투자자의 부재 등으로 뒷받침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는 기업의 리스크를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최근 정부의 카드사 대책에 따라 6월 이전 만기 카드채를 만기연장해주기로 결정하면서도, 금융당국이나 투신사들 어느 쪽도 만기연장할 때 금리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



정보 투명 공개로 자정 기능 갖춰야

실제로 한창 카드사 경영 부실 문제가 불거질 때 금융시장에서는 카드채 금리를 20% 가까이로 책정해 거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석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거래가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가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도 용감하게 싼값에 물건을 내놓지도 않고 사들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 뭔가 불안한 소식이 돌면 일단 거래가 끊겨버린다.
그러면서 미매각 환매사태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나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안이 닥치면 시장이 건강하게 가격으로 불안을 흡수하는 대신, 시장이 마비돼버리는 게 한국 채권시장의 현실이다.


이는 곧 정보 불균형 문제로 이어진다.
평가가 취약하다 보니 대기업을 비롯한 주요 투자자들은 리스크 평가를 내부에서 하고 그 정보를 자신의 투자 결정에만 이용한다.
여기에는 기업 투명성 문제도 한몫을 차지한다.
한국 기업들이 시장에 대해 워낙 정보공개를 꺼리다 보니, 정보는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시장의 ‘합의점’으로서 가격이 설정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윤영환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위원은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업투명성”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든 시장은 기업 리스크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기업이 시장에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그 정보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기만 해도 시장은 충분히 자정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렇게 공급과 유통쪽에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더라도, 수요 기반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고위험 고수익’을 노린 투자자가 나서서 불안이 생길 때마다 가격이 떨어진 채권을 용감하게 저가 매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정보가 공유되고 리스크 평가가 되더라도 가격은 형성되기 어렵다.
미국 금융시장에서 고위험 고수익을 노리는 대형 헤지펀드들이 하는 역할을 누군가가 해주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국내 토양에서는 여전히 연구과제로만 남아 있다.






카드채 문제, 엇갈리는 전망

정부가 카드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대책을 발표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긍정론과 부정론의 엇갈린 시각이 혼재하는 양상이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불안요인이 많이 남아 있어 미래를 예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다른 쪽에서는 상반기 안에 카드사 문제는 연착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다만 3월17일에 발표한 신용카드사 종합대책과 4월3일의 금융시장 안정대책은 단기적으로 시장을 안정시키고 시간을 벌어다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카드사 연체율이 안정돼야만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게 애널리스트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심규선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카드사 문제의 장기 전망은 여전히 안갯속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정부 계획대로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실행되더라도 카드사 수익성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시한폭탄의 시계를 늦춰놓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핵심은 급상승하고 있는 연체율인데, 심 연구원이 보기에 아직 카드사들의 연체율이 하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빨라도 6월말까지 실질연체율은 계속 상승추세일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그때까지 현금서비스 수수료를 인상해주고 카드사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한도 축소를 중단하는 건 상황 호전의 기본 전제다.
그러나 경기가 다시 좋아지지 않는다면 6월말이 지나도 상황 호전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배현기 동원증권 연구위원은 의견이 다르다.
카드사 펀더멘털이 장기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는 시각이다.
1~2월에 연체율이 급상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계절적으로 실업률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또 지난해 11월 이후 카드사들이 무차별적으로 현금서비스 한도액을 줄이면서 연체율이 높아졌는데, 이제 이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카드 이용자의 신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연체율을 조절하면서 한도를 줄여갈 수 있는 단계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 최근 소비가 급감하는 현상을 카드대금 연체자 문제가 건강하게 해결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오히려 좋은 신호로 받아들인다.
근본적으로 가계 빚이 많아 연체율이 높은데, 소비자들이 자산을 팔아치우는 대신 소비를 줄이면서 빚을 갚아간다면 담보자산가격의 하락 없이 가계부채가 줄어드는 ‘연착륙’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배 연구위원은 상반기 중이면 이런 연착륙 과정이 마무리되고 경영 정상화 단계로 들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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