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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케이스스터디] 본분 잊은 유통업체 “나가 있어”
[경영케이스스터디] 본분 잊은 유통업체 “나가 있어”
  • 양우성/ 일본 TMA 부사장
  • 승인 2003.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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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와 소비자 잇는 가교역할 소홀…무점포판매 등 극약처방이 답일 수도

“소비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만한 새로운 아이템 좀 없습니까?”
백화점이나 할인매장, TV홈쇼핑 등 유통업체의 구매담당자들이 요즘 제조업체나 수입업체 등 제품 공급업체에 하소연하다시피 내뱉는 말이다.
물론 바이어들도 자신의 상급자나 경영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매출을 획기적으로 올릴 만한 아이템을 찾아와”라고 하도 쪼아대니까, 연쇄반응으로 공급업체들을 압박하는 것일 게다.
아주 자연스러운 도미노 현상일 뿐이다.


유통업체들의 이런 모습은 게으르기 짝이 없는 한국 유통업계의 낙후된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래가 없어 보이는 듯한 한국의 유통업계가 안타깝기만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통업체들의 존재의의를 이참에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해보고 싶다.


통상 우리나라에서 유통업체들이 챙기는 마진은 소비자가격에서 최소 40%, 최대 80%나 된다.
할인매장이 대체로 납품업체에 40% 내외의 유통마진을 강요하는 것은 불문율처럼 돼 있다.
백화점은 50% 내외, 다단계판매회사라면 80% 내외의 유통마진이 보장되지 않으면 거래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고마진에만 열 올리는 유통업체들

그렇다면 유통업체들이 이렇게 높은 유통마진을 거둬들이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는 상품의 장소이동에 대한 대가다.
대다수 상품들은 제조된 곳과 소비되는 곳이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품을 제조지역에서 소비지역, 즉 시장으로 운반해야 한다.
그것도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서 운반해야 한다.
이 운반과정에 교통비용과 인력비용 등 운송비용이 발생한다.
최소한 운송비용보다는 수익이 커야 상품의 운송이 가능하게 된다.


장소의 불일치가 해소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들이 언제 상품을 구매할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에 운반해온 상품들을 소비자들의 손에 건너갈 때가지 일정기간 동안 보관해야 한다.
창고와 정리정돈, 분류 등의 작업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보관시설, 인력, 장비, 운영 소프트웨어와 노하우 등 여러 부대기능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유통마진이라는 것은 최소한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기 위해 장소와 시간의 이중불일치를 해소해주는 ‘가치’를 창출해주는 대가이어야 한다.


여기에 유통업체의 기본적인 역할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본원적인 가치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상품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해서 구매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사기 위해 다리품을 팔면서 여러 상점을 돌아다닌다.
또 가격, 품질, 성능, 디자인 등 다양한 기준으로 상품을 비교한다.
만약 어떤 소비자가 빠른 시간 안에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도 원하는 상품을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구입했다면, 그 소비자는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상점이나 점원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유통업체가 소비자의 의사결정 비용을 절감시켜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통업체의 세번째 본원적 기능은 소비자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지원하는 것이다.


유통업체들이 소비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효율적인 소비행위를 지원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유통업체들이 제조·생산업체들에게도 소비자들이 진정 원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 이를테면 어떤 기능, 특징, 디자인, 품질 등을 갖추어야 소비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여는지에 대한 정보를 함께 제공한다는 의미다.


이렇게만 된다면 유통업체는 소비자의 의사결정을 토대로 생산자, 제조업체들의 신제품 개발, 품질혁신, 디자인 혁신 등을 유도하고 지원할 수 있다.
그렇게 돼야만 유통업체가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유통업 종사자들은 이런 유통업의 기본 기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통업체의 경영진이나 바이어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뭐 새로운 아이템 좀 없어요?”라며 제조업체, 생산업체들을 졸라대기만 하는 것이다.


사실 제조업체나 수입공급업체는 유통업체만큼 소비자와 시장의 정보를 모을 수가 없다.
일정한 규모 이상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제품이 왜 팔리는지 ‘원인’을 아는 정도다.
반면 유통업체들은 매일 소비자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정보를 제공받고, 소비자들의 구매의사결정과 행동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유통업체들도 소비자들이 특정한 상품을 왜 구매하는지를 이해하려면 피나는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다.
저절로 얻어지는 지식이 아니기에 가치로운 것이다.


그런 지식만이 새로운 상품을 낳게 한다.
미국 델컴퓨터의 창업자인 마이클 델은 PC유통업자들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가치를 대신 가져가고 있다는 문제점을 파악했다.
그는 이 점에 착안해서 소매유통점포를 과감하게 배제하는 ‘무점포판매’라는 혁신적 유통방식을 PC사업에 접목했다.
그러면서 인터넷과 카탈로그, 전화주문 등을 활용해서 소비자들의 주문을 받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양을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결국 그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풀빵 찍어내듯 만들어낸 경쟁사의 PC 대신에 델컴퓨터를 구매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생산에서 출하, 운반, 보관 등 물류과정을 꾸준히 효율적으로 개선해 비용도 추가로 절감했다.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델컴퓨터, 유통혁명으로 세계 2위업체 도약

결국 오늘날 델컴퓨터는 세계 2위의 PC생산업체로 급부상했다.
올해 1분기 매출만해도 95억달러에 이른다.
휴렛팩커드와 컴팩이 합병을 선택한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델컴퓨터의 승승장구였다.
이것은 소비자들이 델컴퓨터의 PC 제조기술이 다른 경쟁사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소비자들은 기술이 핵심이라는 PC에서조차도 ‘좀더 구입하기 편리하고 가격도 저렴한’ 제품을 원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유통업계는 어떤가. 요즘 유력 TV홈쇼핑방송은 부도난 기업의 재고를 가격대폭 할인, 고객사은행사라는 미명 아래 버젓이 판매하기도 한다.
부도난 기업 물건을 팔았을 때 애프터서비스는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조차 없다.
제조업체, 공급업체들에게 어두운 터널을 헤쳐나갈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덤핑과 가격파괴, 끼워팔기, 심지어 땡처리를 부추기고 있다.


진정한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으로 가격을 떨어뜨렸다면,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유익한 활동이다.
그러나 유통업체가 제 역할을 다 못하면, 기업과 소비자 모두를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고장난 등대’가 돼버리고 만다.
그런 시장에 제2, 제3의 마이클 델이 나타나 존재 의미를 상실한 유통업계를 쓸어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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