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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그리운 미친년을 부른다
[서평]그리운 미친년을 부른다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4.07.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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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뜻이 맞아 두 허리를 합하고 다정스레 두 다리를 쳐들었소
흔드는 것은 내가 할 테니 깊고 얕은 건 당신 맘대로
有意雙腰合 多情兩脚擧 動搖於俄在 深淺任君裁


무슨 상상을 하시는가. 이 시의 제목은 가위(剪刀詩). 그저 두 날 달린 가위가 천을 자르는 모습을 묘사했을 뿐.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떠하신가?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볽은 꽃밭 새이 길이 있어/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로/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두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우리 둘이는 웬 몸이 달어...

앞엣 것은 16세기 허난설헌이 썼다고 알려진 ‘가위’란 시이고, 뒤엣 것은 20세기초 서정주가 쓴 ‘대낮’이란 시다.
둘 다 시어에서 어지러운 성적 이미지가 넘치나, 느낌이 다르다.
서정주는 관능의 순간을 직접 묘사한다.
허난설헌은 ‘가위’란 소재를 빌려와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듣는 이를 더 난감한 상상으로 빠뜨리는 쪽은 허난설헌의 시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시대의 차이? 오감이 열리는 관능의 순간에 남자와 여자가, 16세기와 20세기가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차이가 있다면 시인의 상황에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금지된 것이 더 짜릿하니.


갇힌 규방 속 나비의 파닥임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이란 긴 부제가 붙은 책이 나왔다.
<조선의 여성들>. 조선 시대 한시, 소설 등 고전문학 전공자들이 썼다.
책 속 등장인물들의 삶은 ‘가위’보다 짜릿하다.
시대의 온갖 금지에 그들의 범상치 않은 재능이 부닥쳐 파바박, 불꽃을 낸다.
그래서 더욱 유혹적인 시 한 수 더 들려드리겠다.



창밖에 젊은이가 지나가기에 日長窓外少年如
구름 같은 머리를 슬쩍 매만지고는 천천히 홀로 걸어보았다 乍整雲髮獨步徐


이 시를 쓴 김삼의당(金三宜堂)은 첫날밤 시로 남편을 감동시켜 산사에 공부하러 보낸 여자다.
열여덟 새색시가 열여섯살짜리 딸의 어머니가 되도록 남편과 생이별해 지냈지만 그립다고 호소하는 남편을 향해 “포기하고 돌아오면 밤에 방에 들이지 않겠다”며 등을 떠밀었던 여자다.
그래도 피가 달아오르는 걸 어쩌겠는가. 삼의당도 그땐 이십대 젊은 여자였다.
그는 솔직하게 관능을 노래한다.
그랬을지언정 그는 서정주의 시에서처럼 창 바깥으로 나가 젊은이를 부르지는 못한다.
시골양반이라 해도 양반은 양반이었으니, 그의 선택은 현실적이다.


규방에 갇혔건, 들판을 노닐건 나비는 날갯짓한다.
조선 시대 온갖 규율과 금지의 테두리 안에서도 재능은 날개를 폈다.
재능은 가부장제가 쳐놓은 울타리를 부수지 않고 교묘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길을 텄다.
제도는 몸을 가둘지언정 마음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취한 뒤에는 건곤이 드넓어 마음을 열매 만사가 태평하다
고요히 돗자리 위에 누웠으니 잠시 세정을 잊고 즐길 뿐
醉後乾坤闊 開心萬事平 @@@@然臥席上 唯樂暫忘情


이 시를 지은 이는 호연하다 하여 이름도 김호연재(金浩然齋)다.
그의 남편은 여색에 빠져 평생 밖으로 나돌았다.
그런데 호방한 이 여자, 술에 얼큰히 취해 누워 한다는 소리가 ‘만사 태평’이란다.
때로는 은근히 남편을 비롯한 패륜아들한테 일장 연설도 했다.


그가 쓴 <스스로 경계하는 글(自警篇)>의 ‘투기를 경계하는 장(戒妬章)’을 보자. 원래 가부장인 남자가 쓰는 규훈서를 여자가 쓴 것도 눈에 띄는데, 주제도 ‘여성들이여, 질투하지 말라’가 아니라 ‘남성들이여, 패륜을 저지르지 말라’다.


“(남편이) 행실을 조심하지 않고 여색을 좋아하여 나가 놀면 반드시 창녀의 집에서 살고 집 안에 있어도 주색을 끊지 않아서 어느새 황음무도한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타고난 성품이 비록 본래 현명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닫고 착한 길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 어진 벗을 대하면 그가 비록 말하지 않아도 잘못을 스스로 돌아보고는 움츠러들어서 감히 소매를 나란히 하지 못한다.
… 날마다 비슷한 무리들과 더불어 사니 듣는 바나 말하는 바나 오직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에만 있다.
그러니 장차 못하는 짓이 없다.



조선 남자들 사고 틈새 파고드는 강펀치


날카롭게 조선 남자들 사고구조의 틈새를 파고드는 논리의 ‘강펀치’! 바람 피는 남편을 둔 여자들은 속이 다 시원했겠다.
김호연재의 책들은 한글로 번역되어 일가 여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때 여자들은 양반가문 규수라도 한문을 배운 이가 드물었다.
한시의 원음을 음으로만 적고 그 아래에 번역을 부기하는 방식으로 돈 필사본은 대대로 거듭거듭 옮겨졌다.
그 책을 거듭거듭 읽고 또 베낀 여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은이는 “그렇게 하면서 규방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공감을 나누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힘과 지혜를 얻었다”고 해설한다.


이 책은 허난설헌, 이옥봉, 김호연재, 김삼의당 같이 재능이 튀어 규방 밖까지 소문이 났던 문인들 외에도 신사임당, 송덕봉, 임윤지당, 안동 장씨, 강정일당 등 남자들까지 존경했던 당대의 현인들과 김만덕, 김금원, 바우덕이, 윤희순처럼 가부장제에 아랑곳없이 자기 삶을 개척한 여자들의 삶을 소개한다.
발굴된 인물들도 새롭거니와 유명한 인물들의 숨겨진 일화도 새롭다.


가령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꼽은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한테 이렇게 말했단다.
“제가 죽은 뒤에도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이미 칠남매가 있습니다.
그러니 또 무슨 자식을 더 두겠다고 <예기>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겠습니까?”

이런 신사임당한테까지 ‘양처’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이 시대에, 여자들은 사알짝 미치고 싶다.
금지를 뛰어넘는 미친년, 시대의 억압을 부수는 미친년이 되고 싶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까지 자유롭게 하는 미친년은, 남자들도 꿈꾼다.
이 책 말미에 인용된 남자 시인 정호승처럼 말이다.
“그리운 미친년 간다/햇빛 속을 낫질하며 간다/쫓는 놈의 그림자는 밟고 밟으며/들풀 따다 총칼 대신 나눠주며 간다.
(정호승 <유관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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