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공히 특출 난 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필연이자 운명이었다.
이들에게 참모가 없었다면 세계경영의 꿈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부영입 꾀한 칭기즈칸 영토를 점차 넓혀갈 무렵, 칭기즈칸은 필요한 것이 있었다.
드넓은 영토를 경영할 초야의 재사들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몽골인들은 초야를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전투엔 강했지만 정복한 영토를 경영할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라를 효율적으로 경영할 기본지식과 인재가 부족했음은 물론이다.
칭기즈칸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를 리 없었다.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칭기즈칸의 뇌리를 스치는 전략이 있었으니…. 바로 ‘외부인재’의 등용이었다.
침략한 국가에서 쓸 만한 인재를 찾는 것이었다.
이후 칭기즈칸은 불교, 유교, 도교 등에 식견이 탁월한 사람과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
끝까지 반항해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칭기즈칸 스스로 국가경영과 기술을 그들에게서 배울 요량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다.
칭기즈칸의 주변에 많은 재사와 기술자가 모인 게…. 이들의 고견과 식견은 몽골제국의 기틀을 잡았고, 이는 칭기즈칸의 가장 큰 무기가 됐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이다.
칭기즈칸은 집권 시절엔 단 한 번의 반란도 없었다.
이는 칭기즈칸이 국가경영을 잘해서가 아니다.
외부에서 영입한 재사, 참모들의 힘 덕분이었다.
칭기즈칸의 참모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야율초재’라는 사람이다.
그는 도교론자다.
그 시대 ‘도교’ 하면 야율초재를 떠올릴 정도로 유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칭기즈칸이 도교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도 야율초재 때문이다.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에게 늘 상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일리(一利)를 일으키는 것은 일해(一害)를 없애는 것만큼 크지 않으며 일사(一事)를 일으키는 것은 일사(一事)를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
” 정책을 펼 때는 이익이 됐을 때의 효과보다 실패했을 때의 파탄을 더더욱 중요시해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같은 야율초재의 사상은 칭기즈칸이 장기집권을 하는 데 초석이 됐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좌우, 상하 균형을 맞추는데도 많은 공을 올렸다.
칭기즈칸의 성공 뒤편에 야율초재 같은 참모의 헌신적인 노력과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그럼 김우중은 어떨까. 앞서 수차례 언급했듯 김우중은 혼자 힘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그렇다고 경영도 혼자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많은 참모를 주위에 뒀다.
중요한 결정은 늘 ‘나홀로’ 했지만 참모의 뜻을 헤아리고 경청하기를 마다치 않았다.
그의 참모군단은 경기고, 연세대 학연이 주류였다.
특히 경기고 동기, 후배들은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그를 따랐다.
선배들도 김우중에게 조언을 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그렇고 보면 김우중은 참으로 행복한 총수였다.
비단 경기고, 연세대 학연만이 아니었다.
은행권 사람들도 김우중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는 동료였다.
서울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국은행의 기획조사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A씨를 영입했고, 한국은행의 중견간부 B씨, C씨도 스카우트하는데 성공했다.
감우중의 방대한 참모군단 은행권 출신뿐 아니었다.
김우중은 공무원, 법조인, 언론인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도 영입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만큼 김우중은 곁에 두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참모를 둔 적도 없지 않다.
이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해 본다.
때는 군사정권 시절. 군이 정권을 잡은 이상 군 관계자는 김우중에게 좋은 참모가 될 수 있었다.
김우중은 그때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육사맨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의 핵심측근들도 챙기기 시작했다.
일례로, 전 전 대통령의 육사 동기인 K씨는 일찍 예편했는데 페인트 관련회사를 차려 그에게 경영을 맡기기도 했다.
이는 김우중 스스로 정치와 경제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정경유착(정경유착)이 바로 이때부터 싹 텄는지 모를 일이지만 김우중에겐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다.
이같은 수많은 참모 가운데 김우중의 가장 훌륭한 참모는 아마도 동양철학가 김용옥씨였을 것 같다.
칭기즈칸에게 빗대 보면 야율초재 같은 인물이 바로 김용옥씨라는 이야기다.
‘도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김용옥씨는 불교, 유교 등 동양철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이는 동양철학을 유독 좋아하는 김우중의 사상과 궤를 같이했고, 김우중은 김용옥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90년대 초, 두 사람이 함께 있었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김우중은 원주에 있는 계열사의 경영혁신을 위해 기조실 임원, 계열사 임원과 만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때 김우중은 또 다른 참모와 함께 이 자리에 참석했다.
김용옥이었다.
김용옥에 대한 김우중의 대우는 극진했다.
김용옥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곁에 바짝 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김용옥의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혁신회의 때 비밀을 요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때 김우중이 김용옥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부탁했지만 김용옥이 손사래를 쳤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기업경영의 현주소입니다.
회의의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선처를 해주십시오.” 김용옥과 김우중의 특별한 인연 그만큼 김용옥은 그때부터 현실경영의 ‘명암’을 몸소 느끼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그 후 김우중과 김용옥은 해외출장도 같이 다니면서 경영철학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 내용이 대화라는 책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칭기즈칸과 김우중의 성공은 ‘나홀로’ 이룬 게 결코 아니다.
훌륭한 참모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참모들의 성실한 내조가 없었다면 몽골제국, 대우그룹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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